k공작과 언론통제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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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k공작과 언론통제에 관하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k공작과 언론통제에 관하여.
1)k공작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서 King의 맨 앞 자인 K를 따서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만들겠다는 공작 명이었다. 전두환의 핵심 측근들 중 5명은 이미 1980년 3월 중순 이전에 보안사 언론 대책반을 통해 이러한 공작을 준비하였다.
2) k공작은 왜 필요했는가?
5*16쿠데타와 12*12쿠데타는 많은 면에서 유사점이 있다. 하지만 18년동안 많은 억압에 짓눌리고 그에 수많은 항쟁을 했던 한국인들이 또다시 군부의 집권을 반길리는 만무했다. 특히 박정희 무리가 쿠데타를 일으켰던 시기에는 경제적 절대 빈곤이 자리잡고 있었지만 신군부 일파가 쿠데타를 일으켰던 시기에는 어느 정도 경제적 안정이 자리 잡고 있던 때였다. 그래서 신군부는 박정희 정권 시절과는 달리 언론이 단지 침묵해주거나 소극적으로 따라 주는 것 만 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신군부는 언론이 자신들의 집권을 적극옹호하면서도 보호해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는 “신문은 집단적 선전, 선동, 조직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고 주장하고 저널리즘이 그의 충복 대열에 편입되고 나자 “파시스트 저널리즘은 나의 오케스트라”라고 선언한바 있는 무솔리니의 언론관을 상기 시킨다.
3) k공작의 목적
신군부 세력의 집권에 방해되는 3김 세력과 신군부 세력에 호의적이지 못한 학생시위, 노동쟁의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키려 했다. 3김 세력의 대결양상을 ‘구태의연한 정치작태’ ‘대통령 병에 사로잡힌 추악한 파벌싸움’ 으로 비춰지도록 언론의 논조를 유도하였다. 또한 학생 시위와 노동쟁의를 단순한 혼란이나 폭도 등으로 보도하도록 하였다. 1980년 4월에만 약 800여건의 노동쟁의가 있었으나 이에 대해 돌아오는 것은 철저한 탄압뿐이었으며, 언론은 이를 철저히 외면, 왜곡하여 시민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것은 광주항쟁에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광주 항쟁(5월18일)때는 5월21일 계엄사 발표가 있기 전까지는 국내언론에서는 광주사태를 보도하지 못했다. 계엄사 발표 이후 첫 보도가 나가기는 하였으나 이는 기자의 취재를 통한 사실 보도가 아닌 계엄사 발표내용을 간략하게 보도하는 정도였다. 신군부에서는 광주시민들을 폭도, 난동분자, 무장폭도 등으로 보도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즉 혼란이 계속되는 것처럼 보도를 하여 안정세력, 즉 신군부의 집권을 정당화하는데 이용하도록 한 것 이었다.
4)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신군부는 7대 중앙일간지와 5대방송사 2대 통신사의 사장 논설위원 편집국장 등 94명을 1단계 회유 대상자로 선정했으며 이 가운데 회유정도가 양호한 이들을 2단계 3단계로 넘겨 이들을 적극 활용한다는 등의 세부 계획까지 마련해 실천에 옮겼다. 실제로 언론인 포섭공작을 진행해 실제로 14개 언론사 사장, 주필, 논설위원, 보도·편집국장, 부국장, 정치부장·차장, 사회부장 등 모두 94명을 포섭·회유한 결과를 담은 언론인 성향조사 분석표가 10여년이 지난 후 발견되기도 했다.
심지어 전두환의 측근중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노태우 까지 나서서 언론사주 비위맞추기까지 하였다. 잦은 골프 접대와 요정집 회동을 통하여 언론사주와의 밀월 관계 나서기에 나섰던 것이다.
언론인 이외에도 지식인들도 포섭대상이었는데 학자, 평론가, 외국인사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나서서 신문에 연이어 신군부의 집권을 합리화 하는 글을 투고하게끔 회유하였고 이는 그대로 실행되었다.
ㄱ. 탐욕에 의한 자발적 충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