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개론 4

 1  병자호란 개론 4-1
 2  병자호란 개론 4-2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병자호란 개론 4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병자호란
1. 광해군과 중립외교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광해군의 중립외교 때문이었다. 물론 그 이면에는 당시의 붕당정치, 즉 정치적인 상황이 있지만 표면적으로 나타난 사건이 이 중립외교이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당시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전후 복구에 매진할 때였다. 한편 압록강 북쪽에 살던 건주위 여진의 추장 누르하치가 부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건국하였다. 계속하여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후금은 명에 대하여 전쟁을 포고하였고, 이에 명은 후금을 공격하는 한편 조선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당시 후금은 떠오르는 세력이었고 명은 이미 국력이 기울었지만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도와주었기에 광해군은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광해군은 강홍립을 대장으로 하여 조선군을 원군으로 보내지만 강홍립에게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며 후금에 투항할 것을 명한다. 이러한 광해군의 일련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서인들은 인조를 왕으로 추대하는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킨다. 그리고는 친명배금의 정책을 실시하기에 이른다. 이에 후금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쳐들어온다. 이를 정묘호란이라고 한다.
2. 정묘호란
정묘호란은 1627년 후금이 평안도 의주를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정봉수와 이립은 의병을 일으켜 적과 맞서 싸웠다. 후금은 보급로가 차단되자 조선과 강화를 맺음으로써 일단락되었다. 후금의 1차적 목표는 중국 대륙이었고, 조선도 아직 전쟁에 대비할 군사나 보급품이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화의는 쉽게 이루어졌다. 그 후 후금은 세력을 더욱 확장하여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심양을 수도로 하였다. 그리고 조선에 군신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한다.
3. 주화론 VS 척화론
청의 군신 관계 요구에 조선 조정은 두 파로 갈린다. 한쪽은 주화론을 주장하고 다른 한 쪽은 척화론을 주장한다. 주화론의 대표적 인물은 최명길, 척화론의 대표적 인물은 윤집을 들 수 있다. 결국 대세가 주전론, 즉 척화론으로 기울자 청은 다시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입해 온다.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4. 병자호란
1636년 청 태종이 직접 12만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입해왔다. 조선에서는 임경업이 백마산성에서 적을 기다렸지만 청은 백마산성을 돌아 별동대를 한양으로 진격시켰다. 압록강 주변을 1차 경계선으로 하고 있던 조선 조정은 청군의 빠른 진격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윤방과 김상용의 책임 하에 종묘사직의 신주와 세자빈 강씨 원손 봉림 대군 들을 먼저 강화도로 피난시켰다. 그리고 인조 역시 강화도로 피난을 가려고 했지만 이를 안 청군이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막아버리는 바람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하게 된다. 당시 남한산성의 군사는 1만 3000명 이었고, 식량은 50일분 밖에 없었다. 청군은 남한산성에 도달하여 주위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이미 산성 내부의 식량이 얼마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전투를 하여 피해를 입기 보다는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이런 와중에 각지의 군대가 남한산성에 오지만 청군에게 패한다. 산성 안에서는 척화론과 주화론이 대립하던 가운데 결국 주화론이 대세를 이루자 1월 30일에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의식을 갖추어 항복했다. 청군은 돌아가면서 소현 세자와 봉림 대군 등을 볼모로 잡아갔다. 또한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갔다. 청군의 침임은 왜군의 침입에 비하여 기간이 짧았고 지역적으로도 일부에 한정되었기 때문에 피해가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청군이 거쳐간 서북 지방은 약탈과 살육에 의하여 황폐해졌고, 무엇보다 정신적인 충격이 매우 컸다.
5. 북벌론 VS 북학론
당시 오랑캐로 생각하던 후금에게 패하고, 군신관계까지 맺게 되자 조선인들은 충격을 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청에 대한 적개심과 문화적인 우월감으로 인하여 북벌론이 제기되었다. 물론 조선은 병자호란의 항복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청에 사대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은밀하게 국방에 힘을 기울이면서 청에 대한 북벌을 준비하였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은 청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 송시열, 이완, 송준길 등을 중용하여 군대를 양성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효종은 꿈은 북벌을 준비하던 도중 효종이 사망함에 따라 묻히게 되었다. 야사에는 효종의 북벌론이 당시의 대소신료와 충돌을 일으켰기 때문에 효종이 독살을 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즉 북벌론은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할 처지였던 서인들이 계속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였던 것이다. 효종의 북벌론은 군대를 양성하여 실제로 청을 공격하는 것이었고, 송시열로 대표되는 서인들의 북벌론은 조선의 내치에 힘을 기울여 힘을 키여 청과는 일절 관계를 맺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동상이몽’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북학론(?)을 외친 이가 있으니 그가 소현세자이다. 소현세자는 병자호란 직후 봉림대군과 함께 청에 볼모로 잡혀간다. 청에서 9년간 생활하면서 소현세자는 극변하는 동아시아 정세와 청의 위상을 보면서 조선도 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인조가 좋게 볼 리 없었다. 볼모생활을 청산하고 조선에 돌아온 지 2개월 만에 죽고 만다. 실록이나 야사를 통해서 그의 죽음이 매우 의문스럽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소현세자를 치료를 담당한 의원을 인조가 보호함으로써 이 사건에 인조가 관여되어 있다는 야사도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