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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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오늘의 논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
논의 배경 ; 고려 중기 큰 사건 중의 하나인 묘청이 개경에서 서경으로 천도하고자 시도했다가 실패한 사건에 대하여 우리는 ‘묘청의 난’ 혹은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 이라는 상반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는 묘청이 시도한 사건에 대한 시각의 차이 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묘청의 난은 진압되었고, 김부식 외 개경파 귀족들의 승리로 묘청의 반역의 주모자로 부정적인 평가가 내려지기도 한다. 후에 민족사학자 신채호 선생에 의하여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이라 정정되어 긍정적인 사건으로 재조명 되었다. 이와같이 상반된 의견이 나오게 된 이유에 대해 토론을 나눠보고자 한다.
용어정의 ;
묘청
서경천도 운동(묘청의 난)
1135년 묘청이 서경에서 일으킨 반란. 묘청은 고려 제17대 인종 때 풍수 사상을 내세워 지세가 떨어진 수도 개경에서 서경(현 평양)으로 천도 운동을 전개하였다. 서경에 대화궁을 세우면 천하 통일을 이루고, 금나라 및 그 밖의 많은 나라가 고려에 항복하여 조공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김부식 등 개경 세력에 의해 서경 천도 운동이 어려워지자, 1135년 국호를 대위국, 연호를 천개라고 선포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김부식 등에 의해 1년만에 진압되었으나, 묘청의 칭제 건원론이나 금국 정벌론은 자주적 의식을 보여준다. 신채호는 에서 1천 년 역사상 제1의 사건으로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출처
Basic 고교생을 위한 국사 용어사전,
생각열기
이야기 하나
▶서경 천도운동이 일어난 배경과 그 당시의 국내정세
이자겸의 난으로 왕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궁궐마저 불탔습니다. 당시 나라 밖에서는 새로 일어난 여진족이 금(金)나라를 세운 후(1115) 중국의 송(宋)을 멸망시키고(1126) 나아가 고려를 엿보고 있어 불안한 정세가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위기는 점차 민심을 불안에 떨게 했고, 때마침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도읍을 개경(개성)에서 서경(평양)으로 옮기자는 여론이 일어납니다. 이자겸의 난처럼 불행한 일이 발생하는 원인이 개경의 지기(땅의 기운)가 쇠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이죠. 고려 초에는 개경이 명당이었지만 개경의 좋은 기운이 다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서경 길지설은 풍수지리설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땅의 형세에 따라 인간의 길흉화복이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에 집을 명당에 지어야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여서, 도읍지를 명당에 정해야 나라가 발전한다고 믿었습니다. 도읍의 모양이 국가의 운명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