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과 항일 무장투쟁
이종석, "김일성연구" {현대북한의 이해} 181-279
와다하루끼 지음 이종석 옮김,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창작과 비평사 1992)
서대숙,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청계연구소, 1989)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현재의 만경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김형직金亨稷이고 그의 어머니는 강반석姜盤石이었다. 김일성의 어린 시절의 이름은 김성주金成柱였다. 아버지 김형직은 김일성이 태어났을 때 평양의 미션스쿨인 숭실중학 학생이었고 나중에 기독교계통인 명신학교의 교사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김일성의 외할아버지인 강돈욱은 교회 장로로서 김일성의 어머니가 되는 딸 강반석의 이름을 12사도의 첫째인 베드로의 이름을 따서 지어 주었다. 김일성은 그의 자서전 {세기와 더불어}(평양: 로동당출판사, 1992)에서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을 잡고 교회에 가던 것을 회상하기도 하였다.
김형직의 가족은 1919년 만주로 이주하였다. 김일성은 1923년 홀로 평양으로 돌아와 외가가 있는 용산면 하리의 창덕학교를 다녔으며 1925년 만주로 돌아가 이후 1926년 3월 천도교도인 민족주의자 최동오가 운영하였던 만주의 화전현 소재 정의부 소속의 화성의숙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6월 아버지의 죽음과 더불어 화성의숙을 그만 두었다.(북한 문헌들은 26년 가을까지 화성의숙에 재학하였으며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하였다고 주장한다.) 1927년 길림의 육문毓文중학에 입학하였다. 바로 여기서 김일성은 공산주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되었고 조선공산청년회라는 조직에 가입하였다. 1929년 가을에 김일성은 반일활동협의로 중국군벌당국에 체포되어 수개월 동안 가옥살이를 하였고 퇴학처분을 받았다. 1930년 봄 출옥후 길림성 소재 카륜 고유수 지방에서 이종락이 이끄는 국민부 계통의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 대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때 김일성은 당시의 항일운동가들이 그러하듯 다른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김일성金日成이었다. 1931년 초 조선혁명군이 붕괴되자 간도지방으로 이동하여 공산청년동맹 요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일국일당주의의 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항일유격대
김일성이 항일유격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것은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부터였다. 중국공산당은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만주성위에 항일유격대의 창설을 지시하였다. 안도현의 공산청년조직에 속해 있던 김일성도 1932년 4월 반일유격대를 조직하였다. 1978년이래 북한에서 조선인민군의 창군일로 기념하고 있는 4월 25일은 바로 이 날을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안도유격대는 왕청유격대와 합류하였으며 김일성은 유격대 정치위원이 되었다. 이후 동만 각지의 유격대가 단일편제를 갖추어 1934년 3월 결성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에서 1934년 가을부터 3단 정치위원을 맡았다. 한 때 민생단사건에 연루되어 유격구 내 아동학교의 교사로 강등되기도 하였으나 1936년 3월에 결성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3사 사장이 되었으며 1936년 7월 개편이후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6사 사장이 되었다. 김일성의 나이 24세였으며 그가 지휘한 유격대 병력은 약 600명 정도였다. 이 병력의 과반수가 조선인이었다.
이 때 해방이후 북한에서의 권력획득과 관련하여 두 가지 중요한 일을 하게 된다. 그 하나는 조국광복회 조직 확대작업을 주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천보전투를 치렀다는 것이다.
조국광복회
임춘추는 1936년 5월 무송현 동강에서 제2군 고급간부회의가 열렸는데 여기서 재만한인조국광복회의 결성이 결정되었다고 한다. 이어 열린 하리회의에서 위증민은 한인공작의 부활문제에 대하여 몇 가지 지시를 하였다. 그 내용 가운데는 韓人대중에게 조국광복의 반일정신을 고취하라는 것, 만주의 반일운동은 한인의 조국광복운동을 직접원조하고 중한 비압박민족의 해방을 위해 공동전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시키라는 것 등이 들어 있었다.(림춘추, {항일무장투쟁시기를 회상하여} 평양, 1959; 와다하루끼 143-44). 1936년 6월 10일자로 된 [재만한인 조국광복회 선언](발기인 오성륜(전광의 본명), 엄수명, 이상준(이동광의 본명)) [재만한인 조국광복회 목전 10대 강령] 등의 문서는 이 즈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 내용들은 하리회의의 결의를 받아들인 것이지만 실제로 재만한인 조국광복회라는 중앙조직이 만들어 졌는가에 대해서는 불확실하다. 와다하루끼는 만들어졌을 리 없다고 보며 김일성의 제6사가 만주 쪽 장백현의 조선인과 압록강 대안의 조선 쪽 함경남도 갑산군의 주민을 대상으로 공작하여 만든 것이 유일한 조직실태라고 한다.(와다 148-156)
조국광복회의 조직 구축은 36년 9월부터 김일성이 장백현에 정치공작원을 파견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13도구 도천리에서 최초의 조국광복회 지회가 설립되었다. 이러한 작업은 갑산군에서도 진행되었다. 조국광복회 확대작업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당시 함남북부지방의 공산주의자들과 연계를 맺게 되었다. 박금철, 박달, 이송운, 허석선, 김왈룡, 허학송, 이효순 등이 바로 그들로서 이들은 이른바 갑산파로서 김일성의 집권을 뒷받침하는 인적 집단이 되었다. 박달은 1931년 갑산적색농민조합운동을 조직하고 야학을 통하여 프롤레타리아 문화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그들 스스로가 김일성과의 연락을 모색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1937년 1월 장백현의 산중에서 김일성과 박달 등과의 회견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갑산공작위원회라는 공산주의 단체가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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