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산장려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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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산장려운동 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물산장려운동
열강의 지지를 통해 독립을 획득하고자 했던 3·1운동이 실패로 귀결되자 민족의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독립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문화운동이 등장 하였다. 그 중에서도 1923년에 일어난 물산장려운동은 문화운동의 최고봉이었다.
물산장려운동이란 조선인의 생산품을 사용하여 조선인의 산업을 진흥시키자는 경제적 자립운동이었다. 1922년 가뜩이나 취약한 조선인 산업이 한·일간에 관세가 철폐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조선인 경제계와 민족운동계는 조선인 산업의 몰락이 민족의 파멸로 이어질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고조시키면서 물산장려, 자급자작, 소비절약의 절박성을 제창했다.1923년 11월『동아일보』는 「생활적 의의를 철저히 하라」,「생활난의 규호」,「경제적 도태」,「경제적자위」등의 사설을 통해 조선인이 총단결 하여 절박한 경제문제를 해결하자고 호소했다. 이에 발맞추어 조선청년회연합회는 물산장려에 관한 표어를 공모하여 대중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한편, 물산장려를 선전하는 순회강연에 나섰다. 이러한 준비 작업을 거쳐 1923년 1월 서울에서 조선물산장려회가 창립되었다. 조선물산장려회는 우리의 쓰는 모든 물건을 집과 땅과 또 몸뚱이까지 팔아서 남의 손의 공급을 받으면서도 그래도 우리가 여전히 우리 강산에 몸을, 집을 지켜 살아갈 수가 있을까?······부자와 빈자를 물론하고 우리가 우리 손에 산업의 권리, 생활의 제1조건을 장악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도저히 발전을 기대하지 못할것이니······
첫째, 조선사람은 조선사람이 지은 것을 사 쓰고 둘째, 조선사람은 단결하여 그 쓰는 물건을 스스로 제작하여 공급 함으로써 민족의 파멸을 막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는 “내 살림 내것으로”란 단순명료한 슬로건아래 들불처럼 순식간에 확산되었다.
물산장려운동에는 여러 정치세력들이 동참하였다 하지만 임하는 정치세력들의 태도가 달랐으며 물산장려운동의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운동의 실행방법을 둘러싸고 갖가지 견해가 제기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 차이는 논쟁의 형태로 표출되지는 않았다. 이유는 두 가지 였다. 첫째, 운동 자체가 물산장려의 필요성을 선전하는 단계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불과 수개월 만에 사그라들었기 때문이었다. 둘째, 물산장려운동을 비판하는 견해가 일찍부터 제기됨으로써 내부적으로 논의를 진전시킬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산장려 운동을 둘러싼 논쟁은 공산주의그룹 성원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들은 물산장려에 대한 논의가 시작될 때부터 이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놓고 논전을 벌였다. 그들의 논전은 1922년 초부터 국내 공산주의그룹 사이에서 전개된 정치노선 투쟁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
당시 상해파는 문화운동에 의해 민중을 계몽하고 생산력을 향상시키면서 사회혁명을 준비해야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다른 공산주의그룹으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을 뿐 아니라 상해파를 분열시키기에 이르렀다. 이들의 물산장려 지지론은『동아일보』사설, 나경석이 집필한 여러 논설을 통해 개진되었다. 다른 공산주의그룹은 물산장려를 통한 산업진흥론에 동조할 수 없다고 했다. 이는 무산계급이 권력을 획득해야만 신사회에 조응하는 경제와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기에, 문화운동세력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계급투쟁에 주력해야했기 때문이다. 물산장려운동은 토산애용과 산업진흥을 주장하였다. 토산 애용 같은 경우에는 조선인의 생산기반이 매우 취약했기에 조선인의 소비를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렇기때문에 물산장려운동 내부에는 토산애용을 강조하는 경향과 생산증식을 강조하는 경향이 함께 있었다.
이와 같은 조선인의 생산을 증식하는 방법과 관련해서, 물산장려운동 지지자들은 대개 자본주의적인 산업의 발전을 전망하고 있었다. 특히 조선인 중소 생산업자들이 산업조합을 구성해서 우세한 일본인 산업자본과 맞서야 한다는 견해가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일부 논자들은 자작자급적인 수공업과 가내공업을 진흥 진흥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설태희는 자본주의적 기계제를 극력 반대하면서 “물레를 돌리고 베틀을 펴놓으라”고 호소했다. 설태희의 극단적인 수공업 진흥론은 근대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 대한 강렬한 혐오감, 공산주의에 대한 소박한 이해, 대동주의 이상향에 대한 동경을 바탕으로 깔고 있다.
나경석은 식민지의 토착산업이 계속 발전할 가능성을 부정했다. 그럼에도 나경석이 물산장려운동을 지지한 이유는 첫째, 사회혁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생산력의 발전이 인간의 일상생활과 사회진화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므로 조선인의 산업기관을 발전시켜야 한다. 둘째, 조신인은 유산·무산을 막론하고 식민지 민족으로 공통된 이해관계를 가졌으므로, 전민족이 일치단결하여 면사운동으로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
셋째, 물산장려운동은 무산계급의 응급 생활책이 될 수 있다. 물산장려를 비판한 사회주의자들은 물산장려 지지론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했다. 첫째, 물산장려운동으로 조선인 산업이 발전된다 하더라도 조선인 자본가는 외래자본가 이상으로 무산계급을 착취하고 품질이 않좋은 토상품을 고가에 구입하기에 무산계급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둘째, 무산계급이 정치혁명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면 사회혁명에 조응하는 생산력을 급속하게 발전시킬 수 있다.
비판론자들은 민족해방운동 단계에서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의 정치적 이해가 일치한다는 나경석의 견해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이성태 · 박형병 · 장적파는 자본가는 무산자의 적이며, 유산계급과 무산계급의 일치 협력이란 있을 수 없다고 반박했다.
그동안 물산장려 논쟁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충돌’로 이해 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논쟁을 주도한 이들은 공산주의그룹 성원이건 맑스주의 경제학자였다. 논쟁의 논점은 물산장려운동 자체에 제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혁명을 전반에 걸쳐 형성되었다. 물산장려 논쟁은 사회주의운동 내부의 이론전이자 정치노선투쟁의 성격을 지녔다. 물산장려 논쟁을 거치면서 조선혁명론은 이론적으로 정교해지고 구체화되었다. 특히 과학적 사회주의 사회혁명과 정치혁명의 관계, 민족문제, 조선사회의 특수성, 민족통일전선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이에 따라 각 공산주의 그룹은 정치노선을 재정립했으며, 그 결과 각 그룹의 정치노선은 상호 접근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