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란 이후의 일본의 막부시대 대내외 정책, 국내정책, 해외무역 등 개방 조선과의 외교관계 등에 대해
도요토미가 죽은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지금의 도쿄인 에도에 막부를 열고 약 2세기반동안 200여명의 영주에게 일본을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다. 그래서 이 무렵 일본사회는 영주 단위로 행정구역이 발달했고, 사, 농, 공, 상이라는 신분 질서를 만드는 등 사회 제도를 정리해 나갔다. 이때부터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상인 계층의 활동이 활발해졌으며, 이들은 중요한 계급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종교는 불교가 크게 발달하였지만, 서양에서 전파된 기독교도 막부의 탄압 속에서 급속히 전파되었다. 일본이 쇄국정책을 쓰게 된 것도 기독교가 전파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국내 및 대내외 정책
-쇄국
이에야스는 처음에는 해외도항을 허가하고 주인선(=막부의 허가를 받은 무역선) 무역도 허가했었다. 그래서 많은 일본인들이 필리핀이나 태국, 베트남 등에 일본인 마을을 만들고 생활하고 있었다. 태국에서 활약한 야마다 나가마사(山田長政)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맹렬한 기세로 전파되는 것을 보고 위기감을 느낀 이에야스는 기독교 금지령을 내렸고, 이어 3대 장군 이에미쯔는 일본인의 해외도항금지 및 해외도항자의 귀국을 금지시키고, 이 규칙을 어기면 사형에 처했다.
이 무렵 1637년 큐우슈우의 시마바라(島原)에서 농민들이 과중한 세금과 기독교금지 등에 반항하여, 16세의 소년 아마쿠사 시로오(天草四郞)를 대장으로 삼아 잇키를 일으켰다. 막부는 4개월 걸려 이 난을 진압하고, 이후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더욱 강화했다. 그리고, 예수나 마리아의 그림을 밟게하는 방법(후미에)으로 기독교 신자를 가려내어 처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어서 기독교를 믿는 자들이 없어지지 않고 막부의 탄압과 순교가 계속되었다.
막부는 1639년, 쇄국령을 공포하여 기독교와 관계가 없는 네덜란드인과 중국인에게만 나가사끼의 데지마(出島)에서의 무역을 허가했다. 이 쇄국정책에 의해서 일본은 서양문명으로부터 고립되었지만, 일본 독자적인 문화나 산업이 발달했다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개항
일본이 쇄국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 구미제국은 근대국가로서 조직을 정비했다. 18세기 후반, 영국은 산업혁명을 수행하고 세계에 진출하여 해외시장을 손에 넣었고, 미국도 아시아에 진출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당시 세계정세)
18세기 말, 러시아가 일본과의 통상을 요구했지만, 막부는 쇄국을 고집했다. 그 후 영국, 미국의 선박이 일본근해에 와서 물과 식량의 보급을 요구하는 일이 자주 있었지만, 막부는 이를 물리치고, 개국론자들을 처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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