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래에게
머리말
삶은 지루하다. 쫒고 쫒기는 술래잡기가 끝나면 어둑어둑 고요한 저녁이 오듯 삶은 지루하기 그지없다. 어린 시절 술래잡기에 비유해본 우리의 삶은, 그리고 나의 삶은 너무도 허망하고, 아득하다. 소설 ‘술래에게’는 나에게 있어서 그랬다. ‘아 삶이란 이렇게 허망 할 수도 있겠다.’ 가슴이 먹먹했다. 일주일 동안은 소설에서 묘사되었듯 불이 활활 타고난 다음 남은 재가 훨훨 날리듯 자꾸만 ‘술래에게’가 머릿속에서 훨훨 날렸다.
‘술래에게’는 짧은 단편이다. 휙 하고 지나가는 낮은 펀치. 이게 내가 이 소설에게서 얻은 느낌이다. ‘와! 정말로 좋다.’라는 감탄사와 함께 책을 끌어당겨 안아버리고 싶은 소설이아니라, 책을 읽고 난 뒤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아무도 없는 누런색의 늦은 오후가 되거나, 해가 지고 어둑해질 무렵에 아무도 없는 버스를 탈 즈음이면 꼭 이 ‘술래에게’가 생각났다. 이상한 소설이었다.
본론
인간의 삶을 표방하는 소설 구조에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 있듯이 삶의 일부분 어디에서나 위 구조는 수용되는 것 같다. 즐겁게 술래잡기를 함에 있어서도 술래잡기를 하는 발단이 있고, 놀이가 시작되고, 펼쳐지며, 놀이를 하는 중에 있어서 싸움이 일어나기도하고, 끝내주게 재미있을 때도 있다. 그러다가 결국 끝이 나겠지만 말이다. 소설에 있어서 단 한번이라도 노골적으로 ‘그래 재미있는 부분이 끝나고 나면 결국은 허망함 뿐이야’ 라는 것을 가르쳐 준 적이 있던가? 그 재미가 슬픔이건, 절망이건, 사랑이건, 젊음이건 간에 소설에서 분명한 사건은 있다. 하지만 독특하게도 ‘술래에게’는 이렇다 할 사건이 없다. 그렇다고, 주인공에 대한 강한 성격이나, 매력적인 성격이 느껴지는 소설도 아니다. 즉. 소설에서 보여주려 하는 아득한 메시지만 있을 뿐이다. 그저 작가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은 삶. 근본적인 삶이라는 메시지만 있을 뿐이다.
집에서 조그마한 미술학원을 운영하는 가정주부. 대게의 가정이 있는 중년 여성의 시간이란 고등학교 학생의 시간표와 다를 것이 없다. 여기 주인공 ‘나’라는 여자가 그녀의 불륜상대와 처음 만나던, 또는 만남의 계기가 되었던 장면이 있다.
『그는, 오래 전에 내가 살고 있던 아파트의 옆집 남자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옆집 여자의 남편. 나는 그를 늘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세탁소에 다녀오는 길인 오전 열한 시쯤, 아이를 학원에 바래다주고 돌아오는 길인 오후 세 시 아무 때에나 그는 툭하면 엘리베이터에 나와 함께 있었다. p.20』
나는 여기서 그녀의 매우 일정한 일상을 읽을 수 있었는데. 꽤나 정확한 스케줄이지 않은가? 불쑥 예외라는 일도 없을 것 같은 고요하고, 지극히 일상적 삶의 모습이다. 매일 매일 똑같은 것만 반복하면 질리기 마련이고, 벗어나고 싶기 마련이다. ‘나’는 은연중에 지루하기만한 자신의 일상들을 그만 벗어나고자 한다. 결국 벗어나고자하는 욕망들은 아주 작게, 하지만 어떠한 반항보다 크게 표출한다.
앞에서 말했듯 불과 같이 타오르는 사건은 없다. 일상의 무료함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보자 하는 욕구는 아주 조금씩 이유 없이 시작되었다. ‘날 좀 봐주세요.’, ‘날 고요한 이곳에서 구해주세요.’ 라는 식의 스릴 넘치는 장난으로 말이다.
『 오래 전에 나도 그와 같은 장난을 해 본 적이 있었다. 아파트 입구의 공중전화에서 119에 전화를 걸어 남편이 지금 심장마비를 일으켰다고 말하고는 내 아파트 베란다에서 바로 바라다보이는 건너편 아파트의 동 호수를 알려주었는데, 한 시간이 지나도 119구급차는 달려오지 않았다. p.15 』
위험한 장난을 하고 스릴 넘치게 기다렸지만, 응해주는 이 없는 장난.
『역시 오래전에, 나는 아파트 복도의 베란다에서 11층 아래로 침을 뱉은 적이 있었다. p.18』
마흔을 넘긴 소설 속 ‘나’는 사소한 장난 속에서 인생에서 느낄 수 없는 스릴과 희열을 느낀다. 지루하게 흘러가는 긴 인생 속에서 사람과의 만남도, 불륜도 그저 흘러가는 인생일 뿐이라면. 위와 같은 작은 장난들은 막막한 인생의 흐름을 뚫어 보려는 힘없는 시도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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