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는 여기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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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천사는 여기 머문다
작품을 읽는 동안 막다른 골목으로 달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숨도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목구멍이 꽉 막힌 것 같은 고통도 참고 달렸는데 그 끝이 막다른 골목인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모경의 비열함에 대한 동정과 함께 인희의 비겁함에 대한 연민이 동시에 머릿속을 잠식해왔다. 여전히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는 모경과 인희 그리고 그들의 비열함과 비겁함에 대해서 지극히 주관적인 고찰을 해보고자 한다.
우선 작품의 중점에 놓인 두 인물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가정이 있었던 모경과 그런 모경을 욕망으로 바라본 인희는 불륜이라는 이름으로 만나 처음부터 온전하게 사랑할 수 없는 사이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한다. 이혼을 한 모경과 결혼해 삼년간 지속된 둘의 생활에는 인희에 대한 모경의 의심과 모경 스스로의 불안이 쉼 없이 존재했다. 그것은 마치 봄꽃 피는 계절에 황사 바람 부는 것처럼 두 사람 모두를 지치고 망가지게 만들었다. 작품에서 인희는 “자신의 키보다 깊어 허우적거리게 했던 몸 안의 물들이 다 흘러간 뒤에도 흙바람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모경을 사랑했다고 말하지만, 몸 안의 물들이 다 흘러간 뒤라는 말은 인희가 모경에게 가지고 있었던 열정과 욕망이 모두 소멸되었음을 뜻한다. 모경의 뒤틀린 애정의 방식이 인희를 고통으로 몰아붙인 것과 같은 맥락으로 모경의 불안을 잠재워주려 생각조차 하지 않는 인희의 안일한 태도 또한 모경을 불안의 연속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그러니까 둘의 사랑이라는 것은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잘못이 아니라 두 사람 모두의 과오로 해석해야 할 것 같다. 애초에 모경을 먼저 바라보고 있던 인희와 이미 끝났다고 말하는 인희를 놓지 못하는 모경은, 둘의 시작이 그러했듯 마지막까지도 서로 동일한 공간 속에서 다른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작품은 철저하게 인희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모경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스물아홉 살까지 한 번도 연애를 해본 적도 없이 공허하지만 평화롭게만 보였던 인희의 삶을 해일이 이는 바다를 지나는 배처럼 가파르게 튀어 오르게 만든 장본인은 분명 모경이다. 그렇지만 모경이 처음부터 인희와의 인연을 만들고자 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분명 모경보다 확실하게 의사를 표현한 쪽은 인희였고 그것은 작품에서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
『데이트도 한 번 하기 전에, 회식의 끝자리에서 술 취한 모경을 부축해 남몰래 택시에 태우고 혼자 사는 집에 데리고 와 재운 장본인도 나였다.』 전경린 외『이상 문학 작품집』「천사는 여기 머문다.」문학과 지성사 2007 P.31
위의 문장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둘 사이의 위태로움의 시작은 인희였다. 그러니까 작품에 나타나는 것처럼 모경을 마냥 인희를 괴롭히고 고통으로 물들게 하는 인물로만 해석할 것이 아니라 모경의 내면에 숨겨진 아픔을 헤아려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모경을 마냥 악으로만 비약할 것은 아니라고 깨닫게 된 부분은 처음 인희를 만났을 때 모경이 취했던 태도에서부터이다. 일에 몰두하고 한결같이 업무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며 모호하게 행동한 것은 모경이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며 저항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모경은 욕망과 현실적 위치 사이에서 충분히 괴로워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은 상실감 속에서 유일하게 곁에 남아있는 인희에 대한 집착으로 변질되어 나타난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위반을 즐기고 섹스에 기대고 자연스럽고 교묘하게 이성 사를 파고들며 폭력을 일삼는 삼년동안의 시간을 보낸 모경은 다시 이년을 이혼이라는 명목아래 할애하고, 그로부터 이년이 라는 시간이 더 지났음에도 인희를 잊지 못하고 주변을 맴돈다. 모경에게 있어서 지난 칠년의 시간은 자신의 방식대로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이었을지도 모르고, 모경의 인식 속에서 존재하는 요부이며 부정한 아내인 인희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방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모경의 내면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피해의식과 지배적인 욕망은 끊임없이 인희의 곁에 그를 묶어둔다.
『난 늘 네 주위를 떠돌 거야.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를 봐. 유령 같지 않아?
때려줘, 내 뺨을 때려줘, 제발, 때려!
나를 밟아, 내 얼굴을 밟고 지나가, 구둣발로 내 눈을 밟아!』 전경린 외『이상 문학 작품집』「천사는 여기 머문다.」문학과 지성사 2007 P.29
인희를 붙잡기 위해 모경은 사람들이 구경하는 틈으로 자신의 셔츠를 잡아 뜯다가 길바닥에 드러눕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모경의 이런 행동은 마치 발악처럼 들려온다. 어쩌면 인희가 모경을 사랑했다고 말하는 것 보다 더욱 모경이 인희를 사랑했고, 그리고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완전히 서로 남남이 된 이후에도 모경이 인희에게 집착하고 주위를 맴돌고 감시하는 것은 변질된 사랑의 잔해이다. 이런 모경의 비열함에 공감이 되고 용서가 되는 것은 모경도 인희만큼 상처받은 인물이라는 점에 있다. 모경은 평온했던 일상과 맞바꿀 만큼 절대적이었던 인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상처를 후벼 파는 행동을 반복하면서도 쉽사리 현실에 수긍하지 못한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의 불완전한 욕망을 향해 달음박질친다. 이것은 모경이 스스로의 의지대로 제어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모경이 말했던 것처럼 모경의 몸속엔 언제나 인희가 살고 있었고, 모경은 그로 인해 잠시나마 안식을 얻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 안식을 실재하는 인희에게서 찾고 싶은 바람이 강하게 내재하고 있었던 것뿐이다.
오히려 삐뚤어진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 인물은 모경이 아닌 인희였다. 당뇨에 걸린 엄마를 맡아 보살피고 조용하고 착하고 욕심도 없어서 어느 땐 사람 같지 않다는 인희이지만 쉽게 좋은 사람이라고 단정 지을 수가 없었다. 어찌되었든 인희는 결론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멀쩡하던 한 가정을 박살 낸 여자로 새겨졌다. 모경을 사랑했다고 말하지만 그 사랑으로 인해 희생되었던 것들을 너무 하찮게 여긴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를테면 인희의 욕망으로 상처받은 모경의 전 아내와 모경과 인희 자신이 겪어야 했던 고통 같은 것들에 비해서는 인희가 주장했었던 그 사랑이라는 게 너무 쉽게 빛이 바랜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모경의 물리적인 폭력과 함께 수반된 정신적인 고통이 인희가 말하던 사랑이라는 것을 산산이 조각낸 것 일수도 있다. 그렇지만 인희는 너무 극단적으로 자신만이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의식이 밑바닥에 깔려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삶의 연속에 회의를 느낀 인희는 공허하지만 평화로웠던 과거의 자신을 그리워하고, 모경과의 이혼을 겪으면서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과거의 나날로 돌아간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마음 저 깊은 곳에는 여전히 두려움과 원인을 알 수 없는 그리움이 충돌하고 있다. 그것은 미처 빼버리지 못한 반지에서도 찾을 수 있고, 헤어진 지 사 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모경의 뒤를 몰래 쫒아 가며 느끼는 아련한 통증에서도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부터 표면적으로는 평정을 되찾고 있던 인희의 미묘한 감정들이 다시 고개를 들고 그녀를 내면의 복잡한 미로 속으로 집어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