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감상 - 드럼 연주법
……나는 구부려 천천히 신중히 신을 벗으려고 했다. 그러나 편상화의 첫 단추에 손을 대자마자, 뭔지 모를 신성한 것의 출현으로 가득 차 나의 가슴은 부풀어, 흐느낌에 몸 흔들리고, 눈물이 눈에서 주르르 흘러나왔다. 지금 막 나를 도우러 와서 영혼의 메마름을 구해 준 것은, 몇 해 전, 비슷한 슬픔과 외로움의 한순간에, 나(自我)를 하나도 갖지 않던 한순간에, 내 안에 들어와 나를 자신에게 돌려준 것과 같은 것, 나이자 나 이상의 것이었다. 마르셀 프루스트,『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7』, 김창석 옮김, 국일미디어, 1998, p207.
마르셀 프루스트는 할머니가 죽은 지 1년 만에 눈물이 터져 나온다. 왜일까? 바로 몸을 구부렸기 때문이다-생전에 할머니가 몸을 기울여 프루스트의 편상화를 벗겨주곤 했다-이렇듯 “깊은 고통을 일깨우는 것은 바로 몸이다.” 발터 벤야민,「사유이미지」,『발터 벤야민 선집1』, 김영옥 외 옮김, 길, 2007, p195.
그 몸은 거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깊은 생각까지 불러일으키게 한다. 몸을 통해 지금 현재 상태를 가늠할 수 있고 그 상태를 바탕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문제 해결의 단계, 혹은 새로운 의지를 발산하는 단계까지 이를 수 있게 한다. 예를 들면, 얼굴이 창백해진다거나 심하게 붓거나 피부에 열이 난다거나 이유 없이 땀이 나는 등의 몸에 나타난 병적인 징후를 통해서 내게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꼭 질병에 관련된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몸을 통한 앎과 그 후의 실천이 가능하다. 비록 현재 상황이 절망과 고독의 무기력한 상태일지라도 새로운 의지와 힘을 몸은 가능하게 한다. 그것이 바로 몸의 힘이고, 몸의 의미이다.
2.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가능하다면 먼저 몇 개의 이미지를 떠올려보자. 아니, 이미지가 있는 공간 속으로 들어가 대상들을 느껴보자. 밖은 비가 내리고 있다. 뱃속은 게워낸 상태라 나는 방바닥에 쓸쓸하게 누워 있다. 뭔가 알 수 없는 미세한 떨림들이 느껴지는 가운데, 아무런 소리도 못 내고 굵은 빗소리만 듣고 있다. 그런데 허기가 찾아온다. 만약 당신이 이런 고독한 상황에 있다면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미세한 떨림을 감지하는 안테나를 접고 허기를 채우기 위해 밥을 먹으며 해장을 할 것인가? 쓸쓸함을 감당하지 못해, 이곳저곳 전화를 하거나 빗소리가 듣기 싫어 티브이 소리를 크게 하거나 분위기 전환(?)을 하려고 하는 등의 반복적이고 상투적인 행동만 할 것인가? 고독에 대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상황은 완전히 변할 수 있다. 지금부터「드럼 연주법」에 제시된 고독을 대하는 방법을 살펴보도록 하자.
‘나’는 “먹은 것을 다 게워”낸 후 “쓸쓸한 가죽으로 누워” 있음을 알게 된다. 그 앎은 게워내는 하나의 느낌으로 가능하다. 바꿔 말하면, 게워낸 느낌이 선행되지 않았다면 쓸쓸한 가죽에 이르는 자각 또한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얘기다. “비로소”라는 어휘가 이를 말해준다. 쓸쓸한 가죽을 통해 나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떨림의 속도와 강도”를 느낀다. 가죽은 그만큼 아주 섬세하고 민감한 안테나와 같아졌다는 뜻이다. 이 쓸쓸한 가죽, 즉 살은 “우리와 세계 사이에 있다.” 다이앤 애커먼,『감각의 박물학』, 백영미 옮김, 작가정신, 2004, p106.
살은 더 이상 이 세계와 나를 가로막고만 있는 게 아니라 연결시키며 교감하게 해준다. ‘나’에게 느낌은 어느덧 그렇게 온다.
이 시는 처음 제시된 무기력한 상태에서 새로운 상태로 전환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팽팽하게 잡아당겨”지는 가죽을 통해 나의 속은 이제 “팅 빈 종이에 가깝”다. “텅 빈 종이”는 “먹은 것을 게워”낸 상태와 비슷한 맥락으로 봐도 무방하다. 내 안이 비어 있고 백지라는 말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채울 수 있는 여백, 즉 공간이 확보됐다는 뜻이다. 그리고 텅 빈 종이에 가깝게 된 순간, “내 성대는 나로부터 가장 멀리에서 멈”춘다. 성대는 허파에서 나오는 공기에 의해 진동이 일어나 소리를 낸다. 성대가 멈춰 있다는 건 나의 성대로 소리를 내고 있지 않다는, 침묵 상태라는 걸 알 수 있다.
3. 소리를 받아내고 뱉어내기까지
그렇다면 화자는 왜 먹은 것을 게워내고 쓸쓸하게 방에 누워 있을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시인은 9~10행에 약간의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지금 밖에는 밤새도록 비가 내리고 있다. 아무리 “두드려도” 희망은 열리지 않는다. 철문이 열리지 않는다. 안과 밖, 열고 닫음의 기능을 상실한 “철문”은 나의 심리(마음)상태를 말해준다. 바꿔 말해 절망인 것이다. 희망 없음의 무기력한 절망 말이다.
‘나’의 마음은 꾹 잠겨 있다. 그곳을 열고 싶은데 쉽지 않다. 그런데 유일하게 마음의 철문을 “뚫고” “유령처럼 나를 빠져나가는 소리”가 있다. 도대체 어떤 소리일까. 어쩌면 프루스트가 말한 “나이자 나 이상의 것”일지 모른다. 즉 나이면서 나를 넘어서는 것. 그런 게 아닐까. 안과 밖의 제약 없이 이곳저곳을 초월하는 소리를 들을 때, 나는 배가 고파지고, “거의 동물에 가깝”게 된다. 배고픔과 동물성은 하나로 묶을 수가 있다. 둘 다 원초적인 본성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것이 몸에서 느껴질 때, 동물들의 무늬나 어떤 패턴처럼 “나의 소리는 얼룩져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나’의 소리들은 등의 단계를 거쳐 얼룩이 된다. 소리가 얼룩졌다는 말은 무엇일까? 이것은 어떤 단일한 한가지의 패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하거나 드러나거나 선명한 것이 아니다. 기쁨, 슬픔, 분노, 체념, 의지와 같은 여러 가지의 감정의 색깔들이 묻어 있다는 말이다. 그것들이 모이고 뭉쳐서 비로소 밖으로 내는 소리. 어쩌면 이것은 음악이 아닐까 싶다. 어떤 이성적 문법이나 체계가 없는 본능적으로 마음속에서 끌어 나오는 울림이 있는 음악 같은 거 말이다. 이제 ‘나’는 공백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만의 의지와 나만의 연주법을 터득한다. “아름다운 가죽”이 되기 위해 “나는 꼭 다문 입술로/언제라도 비를 맞으”며 “걸어다닐 수 있”고 “어떤 무늬로든 소리 낼 수 있다”고 고백한다. 비록 비가 내리는 척박하고 어려운 환경일지라도. 오히려 그러한 환경일수록 “어떤 무늬”의 소리(음악)를 내야하리라. 그래야만 삶의 새로운 생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화자는 삶의 소리들을 연주하기 위해선, 우선 침묵해야 하는, 자신만의 ‘드럼 연주법’을 터득한 것이다. 왜 화자가 방안에 혼자 있는지 그 이유는 실상 중요치 않다. 왜냐하면 ‘나’는 그 이유(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절망의 상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벗어나느냐에 더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4. 드럼? 혹은 드럼 연주법!
그렇다면 이 시의 제목이 드럼 연주법인 이유는 무엇일까? 처음의 ‘나’는 속이 텅 빈 상태였다. 그것은 마치 드럼과도 같은 상태이다. 내 몸을 드럼에만 비유하고 비어 있는 상태에서 시가 끝났다면 이 시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공백의 공포”만 남는 시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시인은 “쓸쓸한 가죽”, “텅 빈 종이”, “공백의 공포”에서 머물지 않는다. 그 상태들을 몸으로 먼저 알고 난 후 자각하고 새로운 의지로까지 확대했기에 이 시는 의미가 남는다. 내 몸을 드럼과 같은 악기로만 여기지 않고 몸을 통해 ‘내가 나를 연주’하려는 의지가 보인다. 그 의지는 하나의 사물로 전락하지 않게 하는 유일한 방법일 될 것이다. 좀 더 주체적이고 자각하는 능동적인 ‘삶의 연주법’을 익혀나가야 한다는 것을 시인은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것이 이 시의 제목이 ‘드럼’이 아니라 ‘드럼 연주법’인 이유다. ‘지금-상태’가 아니라, ‘상태-이후’가 중요하다. 내가 절망하고 누워만 있다는 사실보다, 절망에서 한 발짝 “걸어”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하리라.
우리는 비우는 것에 인색하다. 또 무엇이든 가득 차 있지 않고 비어 있으면 불안해진다. 마치 전쟁 중에 장전된 총알이 몇 발 없는 군인처럼 말이다. 하지만 “텅 빈 종이”처럼 비움이란 무엇이든 받아들이고 채울 수 있는 가능태라고 할 수 있다. 조금씩 채우고 받아들이고 나 자신을 처음과 다르게 변화시킬 수 있는 그런 가능태 말이다. 여기에서 새로운 ‘희망’이 나타날지 모른다. ‘희망’은 오히려 “먹은 것을 게워냈”기 때문에 가능하리라. 그것이 자발적이냐 우연적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비워졌다는 그 사실 자체이다. 비워야만 내 안에 ‘소리들’이 들어가고 또 나갈 수 있다. 비워야만 세심한 감각이 가능해진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우리 몸을 항상 “가득찬 비어-있음” 이인성,『낯선 시간 속으로』, 문학과지성사, 1983, p311.
의 상태로 항시 열어놓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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