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기독교의 관계
둘째는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궁극의 목적으로 삼아 비뚤어지는 것이다. 문화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떠나 인간의 안정 추구나 나아가 탐욕과 권력욕의 도구가 되어 버린다.
하나님의 구속의 목적은 소극적으로 죄인을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의인이 되게 하시어 인간 본래의 사명을 회복시키는 데 있다. 구원의 비전은 전인격의 변화와 더불어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것이 변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온 세상에 주의 다스림이 회복될 것을 바라본다. 결국 복음 속에는 문화의 회복도 비전의 일부로 포함된다.
기독교 문화의 실체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얼마나 원리에 일치하는 삶을 사느냐에 달려있다.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있음만을 강조하면 현세적 그리스도인이 되며 반대로 장차 임할 나라만을 바라본다면 내세적 그리스도인이 된다.
그리스도인이 문화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법과 규범에 입각해서이다. 우선 창조 명령 자체에 문화를 시험하는 시금석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이다. 이 원리에 따르면 삶을 풍요롭게 하고 활기차게 만들어 주는 문화가 바른 것이다. 예를 들면 게이 문화의 경우, 모든 사람이 동성애자가 된다면 한 세대 후 삶 자체에 위기가 올 수 있으므로 그것이 선한 문화가 아니라는 판단이 가능하게 된다. 또 포르노는 친밀한 사랑의 관계로 삶을 풍성하게 하는 선물인 성을 상품화하여 오히려 비인간화하고 빈곤하게 하므로 잘못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결국 문화 비판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문화의 규범을 명시적 또는 함축적으로 창조 속에 두셨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한국 기독교는 문화적으로 일반 사회에 뒤떨어져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교회가 문화적 우위를 누리고 있었기에 주변 문화와 경쟁하기 위해 별다른 노력을 할 필요가 없었기에 기독교가 성장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 양과 질에서 모두 세상 문화가 압도하고 있다. 그 화려함은 교회를 주눅들게 하고 성도들을 매혹시키고 있다. 우리 사회에 건강하지 않은 오락추구가 만연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문화를 분별하고 이를 복음의 능력으로 변혁해야 할 사명이 있다.
할 수만 있다면 높은 수준의 문화를 개발해야 한다. 과연 기독교 문화가 얼마나 매력을 가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특히 과거와 달리 기독교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이 줄어드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고 기독교 진리를 문화를 통해 전달하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잘못된 문화를 비판하는 일과 더불어 그 대안으로 거룩한 삶의 방식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양면 작전이다.
문화와 기독교의 관계
이런 향락적 문화가 얼마나 비인간적이며 파괴적인지를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동성애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실제 사례 : 자신이 게이바를 열었던 이태원에 ‘서울 갈보리 채플’을 개척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목사가 된 이요나 목사
선천적인 것이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처음부터 동성애자로 지었다고 하여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공평하신 성품에 위배된다. 만약 누군가가 하나님께서 동성애자로 지으셨다고 확증하려면 성경에 명시된 부분을 명확히 제시하여야 하며, 그렇다면 성경이 동성애를 죄로 규정한 것은 모순이며 하나님의 공의는 도전 받게 될 것이다.
동성애의 발전은 대개 처음에는 자신의 성적 선택이 확실해질 때까지 어느 정도까지는 동질의 동성애자들과 관계를 갖게 되며 양성관계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 이미 코디된 육체적 쾌감을 따라 그들은 이성을 기피하고 동성과의 관계를 선호하게 된다.
동성애가 태어남으로부터 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이 성적 감각을 감지할 수 있는 나이는 생리적으로 열 살 전후가 되어야 한다. 물론 아이들의 지능과 EQ 그리고 환경적 영향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보편적으로 성적인 충동은 사춘기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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