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 겪는 고난의 문제에 대하여

 1  그리스도인이 겪는 고난의 문제에 대하여 -1
 2  그리스도인이 겪는 고난의 문제에 대하여 -2
 3  그리스도인이 겪는 고난의 문제에 대하여 -3
 4  그리스도인이 겪는 고난의 문제에 대하여 -4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그리스도인이 겪는 고난의 문제에 대하여 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 종교철학 ]
그리스도인이 겪는
고난의 문제에 대하여
고난의 문제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사건을 겪으면서 여러 가지 감정을 겪는다. 기쁨, 슬픔, 분노, 사랑과 같은. 그리스도인들도, 신자들의 삶 속에서도 이것은 동일하다.기쁨에 벅차오르는 사건이 있는가 하면 도무지 이해도, 해석도 되지 않는 시간 혹은 사건을 경험하기도 한다.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기쁨과 사랑, 소망을 과 같은 긍정적인 사건, 긍정적인 감정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살면서 우리의 실수 이던, 아니면 나의 의지나 원함과는 상관없는 사거이든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겪을 때가 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예외는 없다. 종교철학 수업을 들으며 신이 선한데 악은 어떻게 있는지에 대한 여러 가지 관점과 분석을 읽으면서, 고난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수업을 하면서 부당한 고난, 나의 행위에 대한 결과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당하게 되는 수많은 고난에 대해서는 어떻게 철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인지, 또 그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답변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었다. 이론들을 읽으면서 확대해서 이 문제를 고난에 대한 해석에 적용해보려고 한다.
그리스도인은 또한 삶에서 여러 가지 고난을 겪고, 고통의 시간을 갖는다. 여기에서 우리가 묻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나에게 왜?’라는 것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이 ‘너는 내 것이다.’라는 약속을 믿고 ‘십자가’가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고 믿는것이 그리스도인인데, 그들에게도 고난의 문제는 예외 없이 적용된다. 이러한 고난을 받아들이기 힘들 때는 나의 선택의 여부와 상관없이 어떤 비극적인 사건을 당했을 때이다. 그때 그리스도인들은 좌절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더 나아가 그분과의 관계에 대해서 자신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에 대해서까지 의심하게 된다. 신실한 성도에게 찾아온 연달아 찾아오는 시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하나님 도대체 왜?’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탁월한 설교로 은혜를 끼치던 목사님이 주차장에서 난 사고로 다리를 절단하고 장애인이 되는 등, 신실한 믿음의 성도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아내가 말기 암 선고를 당하는 등, 나의 과실이 아닌 전적인 상대방의 과실로 인해 온 몸에 끔직한 화상을 겪는 등과 같은 일을 우리는 살면서 본다. 나의 경우에도 1년 동안 선교의 현장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을 겪는 믿음의 선배, 혹은 동역자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런 시간을 겪었다. 젊은 싱글 여자 선교사님이 장기로 헌신을 하고 간 선교지에서 말기 암에 걸려 복귀할 수밖에 없는 상황, 사역하고 있는 선교지에서 추방당해서 다른 선교지로 옮기고 옮겨진 선교지에서 사랑하는 딸을 잃는 등.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너무나 가혹하게 찾아온 고난의 사건들을 보면 “왜?”라는 질문을 접을수가 없다. 내가 잘못해서, 혹은 실수해서가 아니라, 파도가 덮치듯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는 고난에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자녀들은 왜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겪어야만 하는가? 이제 이 문제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접근하고 더 나아가 신학적인 접근을 시도해 보려고 한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들어가 고난에 대한 신정론에 대해서 살펴본 후 어떤 철학적인 접근이 하나님의 성품과 반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인이 겪는 고난에 대하여 잘 설명해 줄 수 있는지 알아보기 원한다. 신정론은 변신론 혹은 신의론으로도 표현하기도 하는데 고난에 대한 신정론에는 총 다섯 가지의 신정론이 있다. 첫 번째는 수단적 신정론이다. 수단적 신정론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수단적 선정론은 신이 선한 뜻을 완성하기 위해 악을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결국은 악이 선에 봉사한다는 입장인데, 이것은 신의 전능성에 대한 회의감을 갖게 하고 신의 선함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한다. 두 번째는 교훈적 신정론으로, 고난에 신의 교훈의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C.S 루이스는 자신의 저서 ‘고통의 문제’에서 고통에 대하여 이러한 말을 한다. ‘고난은 하나님의 메가폰이다. 하나님께서는 기쁨을 통해서는 속삭이시지만, 고난을 통해서는 외치신다.’ C.S루이스, 고통의 문제, 홍성사, 2002
라고 말이다. 이 말에 대해서 부정하려는 생각은 없다. 하지만 만약 하나님께서 나의 고난에 교훈의 목적을 갖고 있다면, 무섭지 않은가? 아버지의 따스함이 느껴지는가? 이 신정론은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시각, 불편한 감정을 갖게 하는 부족함이 있다. 세 번째는 보상의 신정론이다. 고난을 딛고 견딘사람에게 후한 보상을 주려는 것이다. 이것은 고문의 심리학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신정론의 한계는 신의 선함을 증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마치 조련사와 같은 모습의 하나님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의 고난을 통해 한 단계씩 성장시키고, 어떤 과제를 수행하고 보상을 주는 것은 인격적인 하나님의 성품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다음으로는 자유의지의 신정론이 있는데, 이것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악은 신의 책임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악을 선택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 이 신정론의 주장이다. 이 이론은 우리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질문을 갖게 한다. 하나님의 한계를 만든다. 그분의 전능함에 대한 의문을 품게 한다. 또 하나의 한계점은 이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해있는 피조물로 배우고 믿는데, 자유의지의 신정론으로 보자면 하나님은 책임감이 없는 분이 된다. ‘너희들이 선택한 것이니까 너희가 책임져.’라는 식이 되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설명하는데도 한계를 갖는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신정론은 고난당하는 신의 신정론이다. 고난당하는 신의 신정론을 설명하기 가장 좋은 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일어났던 사건이다. 독일군에게 무참히 살해당하는 유대인 중 어린아이가 있었고, 그 아이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 있나?’라고 물었고 그 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교수대에 매달려 고통당하고 있다.’ 이 예화가 고난당하는 신의 신정론을 가장 쉽게 설명해주는 것으로 보여 진다. 하나님이 친히 함께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찌 보면 능력 없는 신으로 보여질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신정론이 가장 기독교적이며, 고난 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가장 잘 위로해줄 수 있는 논리적 접근이라고 생각한다.
왜 고난당하는 신의 신정론이 그리스도인의 고난의 문제에 대한 가장 온전한 답안이라고 생각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가 고난당하는 신의 신정론에서 좀 더 눈을 들어서 십자가를 보게 된다면 거기에서 놀라운 고난의 신비를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사족을 붙이자면, 상담학을 전공하는 나의 견해로는 고난당하는 신의 신정론은 고난 당하는 그리스도인을 가장 잘 위로해줄 수 있는 논리라고도 생각 되어 진다. 고난 당하는 사람들이 가장 고통스러워 하는 이유는 ‘왜 나에게? Why me?’ 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고 해석할 수 없는 사건에 좌절하며 무력감을 느낀다. 원망할 대상을 찾아 원망을 하다가 결국 최종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것, 넘어야 할 관문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왜?’라는 질문이다. 나를 사랑한다고 고백하셨던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이 사건을 허락하셨냐는 질문을 하게 되고, 이것에 대한 충분한 답을 얻는 것은 그 사람의 신앙에 있어서 매우 크고 중요한 문제이다. 고난당하는 신의 신정론을 통과하여 십자가를 바라 볼 때 우리는 이 문제에어느 정도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죄가 하나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죄를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휴 홉킨스의 표현대로 부당한 고난의 상징 휴 홉킨스, 고난의 비밀, 생명의 말씀사, 1974
한다. 그리고 이 십자가를 볼 때 우리는 고난을 통해 갖게 되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풀수 있게 된다. 당장에 오해를 풀기에는 어렵더라도 오해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을 의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을 즐기는 무시무시한 사디스트가 아닐까? 우리에게 관심이 없으셔서 우리가 고난을 받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와 같은 의심이 시작된다. 하지만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면 우리는 이 두 가지 의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우리를 향해 평안의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그분은 마치 우리의 의심을 알기라도 하듯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예레미야 29:11
우리를 고난과 고통으로부터 구속하기 원하시며, 더 나아가 우리의 고난과 고통을 없애기 위해 함께 나누신다. 앨리스터 맥그래스, 고난이 묻다, 신학이 답하다. 국제 제자 훈련원, 2010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고통 당하는 것이다. 조지 맥도널드는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의 고난을 면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고난이 자신의 고난과 같은 것이 되게 하기 위해 죽기까지 고난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 여기서 자비란 라틴어에서 나온 말로, ‘어떤 사람과 함께 고난을 받음’이라는 기본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친절’, ‘고려’, 혹은 ‘관용’등의 확대된 의미를 가진다. 자비로우시다는 것은 고난을 받고 있는 어떤 사람 곁에 함께할 수 있다는 것, 그들의 고통과 고뇌를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 앨리스터 맥그래스, 고난이 묻다, 신학이 답하다. 국제 제자 훈련원, 2010
을 말하는데 십자가 사건은, 신이 함께 고난을 당하였다는 신정론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에 대한 의심을 내려놓을 수 있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고난을 당하시는 ‘고난당하는 신의 신정론’은 철학적으로만 접근하기에는 한계점이 분명히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 인격에 대해서 그리고 악과 선에 대해서 가장 기독교적으로 만족스러운 대답을 우리에게 준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
고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