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이브와 낡은 아담 - 엄마로서의 삶과 직장인으로서의 삶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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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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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새로운 이브와 낡은 아담
(엄마로서의 삶과 직장인으로서의 삶 사이에서...)
지금까지 우리는 여성과 관련된 주제로 여러 가지를 알아보았다. 오늘은 지난시간에 알아본 페미니즘의 다양한 풍경에 이어 마지막 주제인 새로운 이브와 낡은 아담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19세기 문학을 살펴보면 동시대인들이 이 현상을 어떻게 지각했는지, 또 이러한 지각이 여성 운동의 속도와 방향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 문제가 작가들의 관심을 끌었다고만 말하는 것은 너무 밋밋한 표현일 것이다. 오히려 열광시켰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문제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 많이, 아주 많이 쓰여졌다. 하지만 19세기에 여성들이 처해 있던 상황에 비추어볼 때 누군가 노동, 도덕, 교육, 또는 부부 영역 등에서 야기되는 논쟁을 통해서, 혹은 에세이나 소설의 형태를 통해서 여성 문제에 접근하려는 경우 이런 저런 지점에서 언제나 권리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즉, 권리가 승인될 것인가 아니면 부정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일부 작가들은 다양한 영역에서 권리를 부인당하거나 억압받던 사람들을 위해 빈번하게 펜을 들었다. 그러나 여성을 위해 펜을 든 작가들은 유럽의 모든 나라를 통틀어서 다섯 손가락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작가들은 수많은 말을 쏟아냈지만, 걱정스런 말, 과묵한 말, 적대적인 말뿐이었다.
가난하고, 버림받은 자들의 생을 이해하고, 대변했던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에밀 졸라(1840~1902)도 ‘모든 여자가 결혼하지 않을 자유를 누리고, 남자처럼 살 수 있고, 모든 곳에서 모든 방식으로 남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사회야말로 이상적인 사회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불구로 만들고, 욕망을 부정하며, 스스로를 삶으로부터 분리 시켜서 좋을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따라서 자연적인 질서가 재확립되고 화해된 두 성 사이에 평화가 이루어지면 모든 사람은 부부의 행복 속에서 자신의 행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라고 휴머니즘의 논리에 맞지 않는 비일관성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화려하게 새로운 이브의 삶을 구현한 여성들조차 전통과의 연속성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프랑스의 페미니즘 주간지 의 1906년 3월호에 실린 자연과학 박사 학위 과정에 있던 로베르의 어머니와 가진 인터뷰 기사에서 확인 할 수 있다. ‘과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해서 내 딸이 잘난체 하는 학자가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 마세요. 그 애는 나를 도와 집안 일을 할 때도 절대 코웃음치는 법이 없죠. 매일 아침 내 딸은 동네에서 장도 보고, 정도 아주 많죠.’ 그리고 5호에는 스웨덴에서 페미니즘의 대의가 가져온 주목할 만한 진보에 관한 이야기가 들어 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스웨덴 여성들이 가족 생활과 모성적 의무에 대한 취향을 잃어 버렸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위의 로베르의 어머니의 얘기처럼 딸이 열심히 집안 일을 하고 싶어 하고 돕고 싶어 하는 기질이란, 남에게 봉사하는 기질로, 예를 들어 남편의 출세를 위해 몇 번이고 만찬을 준비하는 최상층의 부유한 상류 계급 여성을 이러한 자질을 제대로 구비한 전형적인 여성으로 꼽을 수 있었다.
이처럼 이전까지만 해도 여성은 영웅적이고 찬란한 희생 속에서 더 위대한 영광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켰다. 이것은 사회에 깊게 뿌리박힌 여성의 이미지로서 여성적인 미덕이며, 이 덕을 갈고닦음으로써 새로운 이브는 아직도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던 것이었다. 미국의 페미니스트인 스탠턴은 스스로 이러한 미덕을 거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심지어 한 저널리스트에게 대문자로 ‘자기 개발은 자기 희생보다 더 지고한 의무’라고 써달라고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러한 미덕을 존중했다. 왜 의무인가? 왜 바로 권리라고 하지 않았을까? 왜 자기 성취를 즐거움이나 행복의 한 형태로 바라보지 않을까? 전혀 그럴 수 없었다. 상대방의 행복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관심에서 나오는 의무라는 개념이 아직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들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자기 개발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남편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여성으로서의 이미지가 사회적으로 깊게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들은 깊게 뿌리박힌 여성의 이미지들을 정작 뽑지도 못하면서 그 이미지들로 인해 야기된 문제들만 해결하기 바빴다. 왜 여성은 자신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도덕적으로 강제력이 있는 규범에 근거하여 인간의 의지나 행위에 부과되는 구속에 얽매여 살아야 하는가? 도대체 무엇이 부적절한 것일까? 정말로 부적절한 것은 뿌리박힌 이미지가 아니라 그 이미지를 생성한 사회(society)라고 생각한다.
이전 사회뿐만 아니라 오늘날 사회에서도 여성들은 일(경제적 불안정)과 가정(정서적 불안)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갈등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여성들은 철저한 자기 희생이라는 숭고한 순교의 길과 오랫동안 꿈꿔왔던 야망의 길목 사이에서 깊게 생각할 필요성이 있음을 느낀다. 그동안 여성들은 남성위주 사회 속에서 오랫동안 1인 2역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 왔다.
19세기를 거쳐 지금은 여성들이 남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는 시대가 도래했다. 여성들은 진보를 이루어내고, 한 개인이 우뚝 서는 것과 스스로를 가능한 한 높이 일으켜 세우는 것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아직도 남성위주사회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우리 여성들은 느낀다.
오랫동안 사회적으로 구속받아왔고 그렇게 인식된 여성들의 이미지를 하루아침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벗겨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한 가정의 엄마 또는 아내라는 역할과 사회의 한 직장인이라는 역할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은 여성들에게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는 어려운 과제로 남아있다. 어쩌면 풀 수 없는 과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풀지 못하는 과제라고 해서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여성들은 그 속에서 엄마와 프로사이의 균형을 잘 이루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는 다는 것은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여성들은 하나의 인생에 두 가지의 삶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지만 대부분의 여성이라면 두 가지의 삶을 같이 살아야 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엄마와 직장인의 역할은 모두 삶의 연장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을 분리해서 생각하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더 조화로울 수 있을지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남성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들이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행복한 선택을 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여성들의 자기 희생은 상대방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