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을사늑약이란?
③ 을사늑약 체결 당시 시대적 배경
④ 을사늑약의 전문분석 및 영향과 결과
⑤ 을사늑약의 문제점 및 불법성
⑥ 참고문헌
흔히 스포츠경기에서 한.일전 경기가 있다 하면 온 국민이 관심이 집중되고 열광하며 선수들도 강한 정신력으로 경기에 임한다. 왜 이렇게 한.일 관계에 대해서 우리 국민들은 민감하게 반응하고 관심을 기울이는 것일까? 그것은 분명 과거 조상들의 씻을 수 없는 수치와 강점의 시기를 우리들은 항상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욕의 시기의 시작은 언제부터이고 그 사건은 과연 어떠한 결과를 보여주었으며 그 것은 과연 정당한 방식을 통하였는지 우리는 한번쯤 생각을 해보아야 할 것이다. 흔히들 알고 있는 ‘을사조약’이라는 것은 잘못 사용되고 있는 용어이며 우리가 진정 그 조약의 부당성과 문제점을 알 수 있다면 조약이 아닌 늑약이라는 표현을 써야 함이 맞을 것이다. 이러한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아보고 문제점을 분석하면서 과거 조상들의 잃어버린 40년의 수모와 모욕의 역사를 이해하고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연구의 목표이며 이번 조사를 시작하기로 했다.
2. 을사늑약이란?
1905년 11월 17일 한국정부의 ‘박제순’과 일본정부의 ‘하야시 곤스케’에 의해 체결된 불평등 조약으로 을사년(乙巳年)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을사조약, 을사오조약, 을사보호조약이라고도 불리운다. 을사늑약이라는 명칭은 일본에 의해 강제로 맺은 조약이라 해서 불리는 명칭이며 체결 당시 정식 명칭은 ‘한일 협상 조약(韓日協商條約)’이다.
→1905년 10월 일본은 한국에 대한 보호권 확립의 실행계획을 결정하고 11월 1일에 ‘이토 히로부미’를 특파대사로 한국파견을 명령하였다. 하지만 이는 황제 설득용 사절이었고, 외교상 정식 대표는 ‘하야시’ 공사였다. ‘이토’는 한국의 한성에 들어와 황제에게 천황의 친서를 봉정하고 보호조약 승인을 강요했다. 이에 황제는 외교권의 이양, 즉 국제법상의 독립국가의 지위를 잃는 것을 거절했고, ‘하야시’ 공사는 1905년 11월 17일 대신들에게 어전회의(御前會議) 개최를 요구하여 시행하였지만 조약 반대의 의견이 강해 결론을 내지 못하였다. 이에 ‘이토’는 군부를 동원하여 대신 한 사람씩에게 가부를 물었다. 그리고 그들의 발언을 교묘하게 유도하여 일방적 찬성이라는 판정을 내리기 된다. 그리고 18일 오전 1시 반경 협약안에 외상의 직인을 빼앗아 날인하게 되고 강제로 체결하게 된 것이다.
3. 을사늑약 체결 당시 시대적 배경
국내정세
일제는 19세기 후반 세계적으로 제국주의 열강의 영토분할과 식민지지배가 휩쓸던 정세에 편승, 한국을 국제적으로 고립시켜가면서 한국에서의 독점적 지배권을 확대시켜갔다. 즉 제국주의 열강의 세력권 분할 등의 세계 정책을 교묘히 이용, 중국에서 영국의 우월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제2차 영일동맹에서 영
을사늑약 1905 그 끝나지 않은 백년 김상웅 시대의창 2005
(바라보는)한국근현대 100년사 김송달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병합,성립하지 않았다 이태진 태학사 2001
독립운동의 아버지 나철 박성수 북캠프 2003
영상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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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웹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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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대백과사전(엔싸이버) http://www.encyb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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