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계열] 신석기인들의 역사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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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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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호모 사피엔스 등장

- 신석기 시대

- 신석기 시대 유적

- 시베리아 기원설

- 농경의 발달
본문내용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등장하는 후기 구석기시대를 지나 신석기시대에 이르면 인류의 모습은 획기적으로 변화한다. 농경이 시작되는 것인데, 이는 선사시대를 석기 제작기술사에 따른 분류가 아닌 경제사적인 분류가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영국의 역사학자 차일드(Vere Gordon Childe)는 구석시시대를 식량 채집경제단계, 신석기시대를 식량의 자급자족을 위한 생산경제단계로 나누고, 산업혁명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큰 비약이라며 신석기혁명이라고 명명했다. 농사를 지으면서 이동 생활에서 정착 생활로 질적인 전환을 이루는 농업혁명의 시기가 신석기시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만주와 한반도의 신석기시대가 곧바로 농업혁명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신석기시대의 주요 유적들이 대개 강가나 바닷가에 분포하는 것은 이들이 농경보다는 어로 등을 더 중요한 생계수단으로 삼았음을 의미한다. 이들 지역의 신석기인들은 채집과 사냥을 계속하다가 어느 시기엔가 농경을 시작해 정착하게 되었던 것이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으로는 조개무지 유적과 집자리 유적 등이 남아 있다. 조개무지 유적은 신석기인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조개껍질을 비롯한 쓰레기들을 같은 곳에 묻은 결과 생긴 것이다. 평안남도 온천군 궁산리 유적과 함경북도 웅기군 굴포리 서포항 유적 등에서는 조개무지 유적 외에 신석기시대의 집자리가 발견되기도 했다. 집자리 유적은 정착 생활의 가장 강력한 증거이다. 서울 암사동 유적과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 유적 등이 바로 조개무지 유적이 아닌 집자리 유적이다. 이런 곳에서 출토되는 토기 등의 유물들로 신석기인들이 농사나 사냥 등 여러가지 생산활동을 영위했음을 알 수 있다.
황해도 봉산군 지탑리 유적에서는 피 또는 조 등의 재배곡물이 석제 농기구와 함께 발굴되었으며, 평안남도 온천군 궁산리에서는 돌가래[石椒], 뿔가래[骨椒] 산돼지 이빨로 만든 낫과 같은 농기구가 발견되었다. 이는 신석기인들이 농경생활을 영위했음을 말해준다. 또 가락바퀴나 뼈 바늘이 출토되는 것은 의복을 짓거나 그물을 만들어 사용했음을 말해준다.
이 신석기인들은 우리의 직접적인 조상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런데 이들은 어디에서 왔을까?
신석기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규명되지 않았다. 지금가지는 시베리아 기원설이 가장 많이 언급되어 왔다. 시베리아 신석기문화와 우리의 신석기문화가 동일 계통으로 인식된데 따른 것이다. 신석기시대의 표지유물인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는 그 명칭 자체가 북방 유라시아의 캄케라믹(Kammkeramic)을 직역한 것으로서 만주와 한반도의 신석기인들도 시베리아를 거쳐 한반도에 왔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참고문헌
http://mahan.wonkwang.ac.kr/source/01.htm
하고 싶은 말
많은 다운로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