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신라사, 견당사를 통한 동아시아 교류와 일본
2.당과 일본의 관계
3.신라와 일본의 관계
4.발해와 일본의 관계
수와 일본의 관계
수가 건국되어 후한 멸망 이래의 동란기를 거쳐 약 370년 만에 통일하여 581년 문제 즉위와 함께 백제, 고구려가 견수사를 파견하고 신라는 594년, 일본은 600년(문제 개황 20년, 스이코 8년)에 견수사를 파견한다. 일본의 견수사가 파견된 연도에 관해서는 중국의 기록인 『수서(隨書)』에서는 600년으로 일본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이어서 607년(양제 대업3년, 스이코 15년)에는 두 번째 견수사 파견이 있었다. 견수사는 오노노오미 이모코이며, 구법의 불승 10명을 동반했다. 이 때 오노노오미 이모코가 지참한 국서에는 “해가 뜨는 동방의 천자가 해가 지는 서방의 천자에게 국서를 보낸다” 라는 글이 있어 양제의 노여움을 사는 사건이 일어난다. 다음해에 수는 문임랑 배세청을 일본에 보내자, 그에 대한 송사로서 이모코가 세 번째 견수사로 파견되었다. 세 번째 견수사를 파견할 때 도래인인 한인 학생 여덟명을 수에 유학시켰는데 이 것으로 볼 때 당시 일본에서는 어학과 학문이 도래인의 담당영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학생들은 유교, 역학, 불교, 천문역법, 의료학, 언어학 등은 물론이고 국제적인 지식을 일본에 가져왔다. 이 때 수에 파견된 한인 현리와 또 다른 한인 청안은 수,당 교체를 경험하였고 32년간이나 유학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일본의 견수사 파견에서 볼 수 있는 수와 일본의 관계는 오노노오미 이모코가 가져갔던 국서 사건으로 일본의 쇼토쿠 태자가 수 왕조와 대등한 국교를 행하려 했던 것이라는 평가가 그 동안의 보편적 관점이었다. 그러나 중국 왕조 측의 견해로 보면, 수 왕조에 대한 일본의 견사 조공은 일본은 ‘화외모례’의 나라, 즉 중국 왕조의 질서체제인 예전 세계의 외부에 있으면서 이를 사모하여 조공하러온 이민족의 나라였다. 즉, 중국 왕조 입장에서 일본 수장의 칭호의 여하는 중국 왕조의 질서 체제와 상관없는 문제일 뿐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일본 측의 입장에서 이 국교를 살펴보면 일찍이 5세기 경에 왜 5왕이 남조 송에 견사 조공했을 때는 일본 스스로가 자진해서 관작을 청원하고 중국 왕조의 질서 체제 속에 편입하여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지배권을 인정받으려고 했다. 그에반해 스이코천황 시대의 견수사 파견은 적어도 중국 왕조의 관호를 요구하거나, 혹은 나아가 책봉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일본은 오히려 스스로의 질서와 권위를 형성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이는 일본 스스로가 수에 보내는 국서에 천자라고 칭한 것에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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