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억지 사상과 프랑스의 핵전략
Ⅱ 프랑스의 핵개발 배경과 전개과정
Ⅲ 프랑스의 핵전력개발과 외교전략 - 5공화국(드골)을 중심으로
Ⅳ 프랑스의 핵전력 현황
Ⅴ 핵과 관련된 프랑스 동향
드골 대통령은 “독립은 한 국가가 주권에 해당하는 국가방위를 자신의 책임 하에 통제하는 것을 의미한다.”라는 의견을 내세우면서 “핵억지력 보유 및 이를 통한 프랑스 영토의 성역화”를 강조하였다. 이를 통해서 프랑스의 자체적인 독립성이 강화되고, 동시에 프랑스의 다극체제 구축을 위한 국제적 위신도 제고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드골의 이러한 인식에 따라 프랑스는 독자적인 핵억지력 보유에 의한 프랑스 영토의 성역화를 추진하게 되었다. 드골의 인식에 따르면 프랑스의 국제적 위신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독립적인 방위력 확보가 필수불가결의 조건이었으므로 이를 위하여 독자적인 군사력, 즉 독립적인 핵억지력이 필수적이었다. 다시말해 프랑스는 핵억지력 보유를 통하여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프랑스의 안보를 확보할 수 있는 동시에 세계무대에서 강대국으로서의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3.갈로와 장군의‘비례핵억지이론’
프랑스의 핵전략은 프랑스의 유명한 군사전략가인 ‘삐에로 갈로와’ 장군의 ‘비례핵억지이론’에 근거한 ‘독자적인 핵억지전략‘이다. 삐에로 갈로와 장군이 주창한 비례핵억지이론은 “핵 초강대국과 핵 약소국 사이에서도 일종의 ’공포의 핵균형‘이 형성됨으로 해서 아무리 약한 국가라도 그나라 수준에 맞는 적절한 양의 핵무기를 보유하게 된다면 어떠한 핵 강대국에 대해서도 핵억지가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로써 소련과 같은 핵 초강대국이라 하더라도 소규모의 핵탄두와 운반수단을 가진 프랑스에게 선제 핵공격을 가해 오는 경우, 프랑스의 핵보복공격으로 소련의 ’모스크바‘,’레닌그라드‘와 같은 적국의 수도나 주요도시에 보복공격을 가하여 대량의 피해를 주게 된다면, 소련은 핵 선제공격을 억제할 수밖에 없을 것이므로 프랑스의 소규모 핵전력과 소련의 막강한 핵전력 간에도 ’비례적 핵균형‘이 성립되어 소련의 핵공격을 억지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핵개발 배경과 전개과정
1. 2차 대전의 상황
2차 대전 중 미국은 「맨하탄 프로젝트」를 통해 당대의 초병기 원자폭탄을 개발하는데 성공하고 이로 인해 세계는 그 이전과는 차원이 달라진 정치군사적 환경을 맞이하게 된다.
이 때 연합국으로서 이 프로젝트에 동참했던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으로부터 당연히 기술이전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물론 같은 연합국이던 소련에게는 비밀이었지만 소련은 공산국가이니까 그런 것이고 자신들은 서방 국가인 만큼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태도는 달랐다. 우선 미국은 전후 국제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전시협력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를 동등한 강대국으로서 취급하지 않음으로써 이들 국가들의 자존심에 커다란 상처를 입혔다. 게다가 1946년 8월 미 의회는 핵물질과 핵기술의 해외 이전을 금지하는 맥마흔 법안을 전격적으로 통과시켜 핵무기를 독점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미국의 오만한 태도와 일방적인 조치는 영국과 프랑스에게 큰 충격과 굴욕을 안겨주어 이들이 독자적 핵개발을 자극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2. 프랑스의 상황
한편 프랑스의 경우는 상황이 훨씬 나빴다. 프랑스는 2차대전 중 독일에 패해 본국이 점령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맨하탄 프로젝트에 본격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고 3류 취급을 받았다. 즉 핵개발 전 과정에 참여한 영국 과학자들과 달리 프랑스 과학자들은 핵폭탄 제조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중수로와 플루토늄 분리 업무에만 부분적으로 참가하였다.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45년 10월, 드골은 수상 직속으로 프랑스 원자력위원회(CEA)를 설립해 핵기술 확보에 나서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전후복구가 절실했고 영미에 비해 뒤쳐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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