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석불사의 기원
(1) 석불사의 창건
(2) 역사적 배경과 의의
3. 석불사의 구조
(1) 인공석굴 석불사
(2) 전실. 비도. 주실
(3) 38위의 불상들
(4) 궁륭형 천장
4.세계문화유산 석불사의 문화재적 가치
(1) 종합건축물. 석불사
(2) 화강석의 의미
(3) 민족의식 고취
(1) 석불사의 창건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보면,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751년(경덕왕 10)에 대상 김대성이 불국사(佛國寺)를 중창할 때, 왕명에 따라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현세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는 한편, 전세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는 불교의 인과응보(因果應報) 설화를 기반으로 한 요소가 엿보이는 전설적인 유래이지만, 석굴암은 김대성 생전에 완공을 보지 못하여 그 조영사업은 국가가 마침내 완성시켰다고 한다. 이 점은 분명히 석굴암의 창건이 김대성 이라는 개인의 원력으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왕실을 비롯한 당시 신라인 모두가 염원한 거족적인 일대 불사(佛事)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업보윤회사상은 기본적으로 인과응보관(因果應報觀)에 근거를 두는데, 즉 현재의 모든 사람의 상태는 한결 같이 과거에 했던 행동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내세의 보다 좋은 삶을 위한 현세의 착한 행동을 고취시키는 취지를 내포하고 있다.
(2) 역사적 배경과 의의
석굴암의 본존불은 똑바로 동해를 향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동해중의 한 지점인 동해구를 응시하고 있다. 석굴암의 위치는 신라 왕조의 중요한 유적이 집중되어 있는 동해구를 의식적으로 향하도록 선정하였다는 것이다. 동해구란, 삼국통일의 영주인 문무왕(文武王)의 해중릉(海中陵), 즉 대왕암(大王巖)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을 말한다. 문무왕은 욕진왜병(欲鎭倭兵)하고자 동해의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이승에서까지 국가수호의 집념을 잃지 않겠다는 군왕이었다. 이 같은 호국사상은 동해구의 유적인 해중릉을 비롯하여 감은사(感恩寺)나 이견대(利見臺), 그리고 석굴암과 동해구와의 관계 등에서 같은 맥락으로 파악될 수 있다. 이 점은 석굴암의 창건주인 경덕왕의 선왕, 즉 효성왕 역시 화장 후 산골 된 곳이 이 동해구여서, 석굴암 대불의 시각이 동남동 방향으로 동해구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과 연관성이 있다. 그것은 곧 신라인의 믿음과 호국정신의 요람으로서 국찰(國刹)도 같았던 석굴암의 존재를 뚜렷이 부각시켜 주는 예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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