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삼포란?
2. 삼포왜란이 일어나기 전 조선과 일본의 관계사
1. 삼포왜란 이후 대일관계
2. 삼포왜란의 의의
토론내용
1. 삼포란?
조선초기 일본일들의 왕래와 거주를 허가하였던 남동해안의 세 포구. 지금의 부산진에 해당하는 동래의 부산포와 지금의 경상남도 진해시에 해당하는 웅천의 내이포(제포), 마지막으로 경상남도 방어진과 장생포 사이에 해당하는 울산의 염포를 말한다. 부산포진은 동래현의 남쪽20리 지점에 있었으며 1488년(성종 19년)에 성을 쌓았고 수군첨절제사가 다스렸다. 웅천의 내이포진은 웅천현 남쪽 5리 지점에 있었으며 수군첨사가 다스렸고 수군만호가 1명 있었다. 울산의 염포진은 울산군 남쪽 23리 지점에 있었고 본래 수군만호가 다스렸는데 삼포왜란 뒤에 진을 폐지하였다.
2. 삼포왜란이 일어나기 전 조선과 일본의 관계사
① 세종: 세종 초에는 삼포에 거주하는 항거왜인의 수를 60명으로 한정 하였다. 그러나 항거왜인의 수는 1466-1494년의 약 30년 동안 2천명 가량으로 늘어났다. 그 수가 급격히 늘어난 것은 생활 안정을 위해 건너오는 일본인이 많았기 때문이다.
② 성종: 항거왜인의 수가 늘어나면서 여러 가지 정치. 사회. 경제적 문제가 일어났다. 회유책의 일환으로 왜구와 공무역의 형태를 띤 면포가 크게 늘어나면서 국가 재정의 궁핍을 초래하는 것이 특히 문제였다. 1494년에는 일본 국왕사절이 가지고 온 사진물(私進物)이 면포 28,829필에 해당하는 많은 양이었다. 이러한 재정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사진을 금지하는 억제책을 실시하였다. 또한 항거 왜인의 수가 늘어나면서 그들이 토지를 점유하여 경작하게 되는 경작지의 수가 늘어났다. 이에 성종은 경작지에 대한 수세를 실시, 뿐만 아니라 호구조사 또한 실시하여 포용적 정책에서 탈피하여 강경책을 펴 나갔다.
③ 연산군: 연산군의 실정(失政
정영애 지음. 넥서스출판. 1996
이영. 김동철. 이근우 공저.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 1999
손승철.김세민.강대덕.최호균.유재춘.이상배.엄찬호 공저. 동사출판.2001
손승철 지음. 국학자료원 출판. 1999
손승철 지음. 지성의 샘 출판. 1994
http://kin.naver.com/browse/db_detail.php?dir_id=110101&docid=121627
http://100.empas.com/pentry.html?i=146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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