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무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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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시대의 무녀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ⅰ) 무녀 금지와 무세(巫稅)
ⅱ) 무녀의 역할
ⅲ) 무녀의 신분과 가족생활
ⅳ) 무녀와 굿
Ⅲ. 결론
본문내용
ⅰ) 무녀 금지와 무세(巫稅)

조선 초부터 무당에 대한 금지는 계속 있어 왔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나라에서는 국무당(國巫堂)를 직접 채용하여 도성 안에 살게 하고 굿을 하였다. 왕실에서 조차 병이 나고 위독해지면 무당에게 치료를 맡겼다. 그 예로 태종의 아들인 성녕대군이 병에 걸려 위독하게 되자 무당이 치료를 한다고 귀신에게 기도를 드렸지만 결국 죽게 되자 그 무당들을 유배 보냈다고 한다.『조선왕조실록』 태종18년(1418년) 2월 11일, 3월 5일
또한 성종이 병이 들자 대비가 무녀(巫女)를 시켜 대성전(大成殿) 공자의 위패(位牌)를 모시는 전각.
뜰 가운데서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 병이 낫기를 빌었다. 그러자 성균관 안의 유생들이 무당을 쫒아 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대비는 크게 노하여 그 선비들에게 벌을 내리려고 하자 성종은 오히려 칭찬하며 잔치를 베풀어 주고 상을 내렸다고 한다. 차천로(車天輅 1556∼1610),『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

세종 때에는 국무당이 있기에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무당을 믿지 않는 자가 없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느라 재산을 탕진하는 등 폐해가 많다 하여 먼저 국무당을 없애 백성들이 본받게 하자고 사간원에서 상소를 올리게 된다.『조선왕조실록』 세종 8년(1426년) 11월 7일.
그러나 무당을 없애야 한다는 신하들의 강경한 태도와는 달리 왕은 전부터 금하긴 했지만 없어지지 않고 있는데 어찌 갑자기 다 없애며, 법은 있다 하더라도 실행하는 것은 힘들 거라고 신하들에게 말하고 있다. 신하들이 거듭하여 무녀를 금하자고 하자 이미 법이 있으니 그대로 행하라고 한다. 위의 책, 세종 25년(1443년) 10월 16일.

그 법이 내용을 보면 서울 안에 머물고 있는 무녀는 지방으로 내쫒고 지방의 무녀는 다른 지방으로 내쫒는 것이었다. 또한 적발이 되면 무적(巫籍)에 등록시키고 만약 숨겨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또한 중(重)한 처벌을 받게 하였다. 위의 책, 세종 25년(1443년) 8월 25일.
조선시대 내내 서울 안의 무녀를 내쫓고, 그들이 다시 서울 안에 들어오면, 다시 내쫓아내는 일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실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위의 책, 성종 6년(1475년) 8월 13일. 영조 39년(1763년) 10월 5일. 순조 15년(1815년) 1월 15일. 약 17건(이능화, 조선무속고, 동문선, 제12장 p.123~p.133 참고)

참고문헌
이능화,「조선무속고」, 동문선, 1927.
아카마쓰 ,아키바 「조선무속의 연구(상․하)」,동문선, 1937.1938.
백영자․최해율, 「한국의 복식문화」, 경춘사
이배용,「우리나라 여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청년사,
편집부,「어우야담」,전통문화연구회
이월영외 역(譯), 「청구야담」, 한국문화사
林學成, , 논문
조아란, , 논문, 1997.


참고사이트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com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
민족문화추진회 http://www.minchu.or.kr
KoreaA2Z http://www.koreaa2z.com/
네이버 http://www,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