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국공내전
3. 영화내용
4. 느낀점
1925년 쑨원이 죽자 장제스는 국민당의 군대인 국민 혁명군의 총사령관이 되었고, 군벌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중국 북부를 국민당의 영향 아래 두기 위해 북벌을 준비한다. 이 무렵 국민당은 우파와 좌파로 분열되었고 공산당은 계속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1926년 3월 중산함 사건으로 국민 혁명군 내의 공산당원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장제스와 공산당 및 국민당 내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 와중에도 장제스의 국민 혁명군은 민중의 지지를 받고 후난 성, 후베이 성, 푸젠 성, 저장 성, 장시 성, 안후이 성의 6성을 국민당의 세력 안에 편입시키고, 우페이푸(吳佩孚), 쑨추안팡(孫傳芳) 등의 군벌을 격파하고 만주 군벌 장쭤린과 대치하였다.
1927년 3월 상하이의 노동자가 무장봉기하여 장제스 군대를 맞아들였지만, 공산주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싫어하는 상공인과 부유층 및 외세 의존 세력은 장제스에게 중국 공산당과 관계를 끊을 것을 강요하였다. 그해 4월 12일 장제스가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학살 작업을 벌인 4·12 사건이 터져, 중국 공산당은 공산당원의 5분의 4가 학살되는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고 지하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로서 제1차 국공 합작은 결렬되었고 국민당과 공산당은 분열되어 내전 상태에 들어갔다.
ㆍ반공산당 토벌전
장제스는 농촌 지역에서 끊임없이 세력을 키우고 자치 정부(소비에트)를 구성하는 공산군을 토벌하기 위해 수차례에 걸쳐 대규모 공격을 개시하였는데 이를 ‘토공전’(討共戰)이라 한다. 공산당의 군사 조직인 홍군은 종종 홍비(紅匪)로 불렸다. 다음은 이 시기의 주요 토공전에 투입된 장제스 측 국민 혁명군의 규모이다.
이러한 대규모 토벌 작전에도 불구하고 장제스의 국민당군은 홍군을 완전히 분쇄하지 못했는데 이는 인력과 물자가 부족한 홍군이 철저한 게릴라식 유격 전술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대규모 토벌전에서 국민 혁명군은 종전의 토벌 방식을 바꾸어 대규모 진지, 토치카를 짓고 지구전적인 진지전을 펼쳤는데, 홍군은 이 전술에 말려들어 주요 근거지인 장시 성 해방구를 잃게 될 위험에 처하였다.
이때 홍군은 필사적인 후퇴 전술을 택해 중국 대륙을 돌아서 산시 성에 이르는 이른바 대장정을 감행하고 국민당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새로운 근거지를 찾게 된다. 공산군의 주력은 무사히 옌안에 도착하고 그곳을 새로운 수도로 정하고 군벌 출신의 장쉐량과 대치하는데, 장쉐량은 공산당에 동조적이고 공산당이 주장하는 항일 정신에 경도되었다. 마침내 1936년 장쉐량은 시안 사건을 일으켜 장제스를 설득, 공산당과의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 통일 전선이 성립하게 된다.
ㆍ중일 전쟁
1937년 이후 일본 제국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공산당과 국민당은 제2차 국공 합작을 결성, 공동으로 일본군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 공산군은 제8로군과 신사군으로 개편되어 국민 혁명군에 소속되지만 사실상 장제스의 통제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항일전을 벌였다.
이 항일 전쟁 기간 동안 장제스의 국민 혁명군은 일본군에 패하여 세력이 점점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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