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문화] 중국고유의 악습, 전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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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문화] 중국고유의 악습, 전족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1. 전족이란?

2. 전족의 기원

Ⅱ. 본론

1. 전족은 어떻게 하는가?

2. 전족의 형성 원인

3. 남성의 전족

4. 권문세족의 전족

5. 전족과 여성생활

6. 배우와 전족

Ⅲ. 결론


본문내용

이렇듯 전족의 관습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보편적인 전족이 처음 나온 것으로 알려진 것은 960년대 유명한 풍류가이자 문학가이기도 했던 남당의 황제 후주 이욱의 조정에서였다. 후주는 6척 높이의 금연(金蓮)을 만들어 온갖 보화로 장식한 후 후궁인 요랑에게 비단으로 발을 졸라매고 그 안에서 춤을 추게 했다. 이때의 풍경이 인상적이어서 당시의 후궁과 무희들이 다투어 이를 모방하여 전족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전족은 '금련, 서연'이라는 식으로 미화되어 불려지게 되었고, 조그만 구두인 궁혜를 신은 요염한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미적 감동을 주기 시작했다. 송대 이전에는 비록 전족 풍속이 아직 형성되지 않아서 발에 대해서도 작지 않으면 안 된다거나 무조건 작게 만들려는 광적인 현상까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때에도 여성의 발은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관념만은 존재했었다. 동한 말기의 민요에는 “가냘프게 내딛는 여린 발걸음, 섬세하고 아름답기가 세상에 둘도 없다네.”라는 구절이 있다. 이것은 분명히 여성의 발이 가냘프고 작은 상태를 찬미한 내용이다. 당대 한옥(韓屋)의 시에는 여성발의 아름다움을 “6치의 작은 발, 그 살결 곱고 윤기 흐른다.”라고 묘사하였다. 당대의 척촌은 지금보다 짧아서 6치는 18cm, 즉 5.45치 정도이다. 작다는 것은 여성 발의 아름다움 가운데 한 측면일 뿐이다. 전족이 유행하던 시대에 묘련 1쌍은 이른바 ‘가냘픔’, ‘작음’, ‘뾰족함’, ‘굽음’, ‘향기로움’, ‘부드러움’ 그리고 ‘단정함’이라는 7가지 표준을 갖추어야만 했다. ‘가냘픔’, ‘작음’과 ‘뾰족함’이 요구하는 바는 사실 모두가 작게 만드는 것이다.

『 향기로움 아낌없이 내뿜으며 연꽃 밟듯 걷는 걸음
깊은 시름에 젖은 비단버선이 물결 차듯 지나가네.
춤사위에 이는 바람만 느껴질 뿐 어디에도 지나간 흔적조차 없다오.
남몰래 궁중식으로 차려입어 차분한데 나란히 섰던 두 발 넘어지니 애처롭네.
그 섬세한 아름다움 어찌 말로 다하리 그저 손안에 놓고 즐겨 볼 뿐. 』
위의「보살만(菩薩蠻)」이라는 시는 송대의 시인 소동파(蘇東坡)가 지은 것이다. 이 시는 중국의 시사사(時詞史)에서 전문적으로 전족을 읊은 최초의 작품이다. 전족시(纏足時)의 창작은 전족 풍속의 출현을 전제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이처럼 많은 자료가 송대에 이미 전족 풍습이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증명해 준다.

전족을 언급할 때 반드시 3치의 크기가 따라붙는 것은 명대에서 비롯되었다. 예를 들면 왕홍점(王鴻漸)의「서루악부(西樓樂付)」에 “선홍색의 부드러운 3치 신발이 가지런하다네.” 라고 했고 주유돈(朱有燉)의「원궁사(元宮詞)」에 “모서리 앞에 3치 전족 신발이 드러나 있구나.”라고 했으며『서유기(西遊記)』에 ‘봉황새부리 모양의 3치 전족 신발’이라고 언급한 것들이 그것이다. 여성의 전족은 작을 뿐만 아니라 활처럼 굽어야 하며 나아가 삼각 면체의 형태 등 갖가지 요구를 하게 된 것도 마찬가지로 명대부터 시작되었으며 이는 ‘시대적 이상미’의 형태로 정리되고 빠르게 발전하였다.

중국미인의 대명사인 당대 양귀비의 발은 3촌밖에 되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한데 전족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안정된 농경사회의 타성이 작고 섬세하고 유약한 것을 숭상하는 문화를 발전시키고 여성에 대해서도 섬세하고 병약한 아름다움을 강요하는 현상을 나았다고 할 수 있겠다. 전족의 시작은 궁중의 여인들과 상류층의 여인들이었다. 일반의 서민에게도 나중에 전족이 유행했다고는 하지만 전족은 굉장한 통증과 거동의 불편함을 수반한다. 일이 많은 서민층의 여성이 거동이 불편하면 곤란하다. 그러므로 전족은 어느 정도 권세가 있는 집안이나 부자가문의 여성들에게 볼 수 있는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가사를 하기에 불편함이 많았기 때문에 시중들 여자가 있어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복식사의 ‘하향전파이론’에 대한 학설을 증명하듯이 전족의 유행은 모든 사람들에게 확대되었다.

전족을 금련이라고 부르는 데는 유래가 있다. 남북조시대 재나라의 동혼홍라는 호색 공주는 정사는 돌보지 않고 매일을 주색으로 보냈다. 그에게는 반비라는 총애하는 비가 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