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언론과 방송
1. 제 2공화국 때의 언론 상황
2. 박정희 대통령 집권 이후
경향 신문 강제 매각
유신 헌법 이후 심해진 언론 탄압
박정희 정권의 집요한 공세 속에 언론계는 점차 위축되어 1967년 이후 기자의 구속, 폭행 등의 사건이 발생해도 보도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이 같은 언론의 무기력증에 대해 1967년 선거 후 대학생과 독자들의 비판 및 언론계 내부의 자성이 잇따랐다. 곧 1971년 4월, 젊은 기자들을 중심으로 `언론자유 수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그 해 10월 제2의 언론자유 수호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군부는 1971년 12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통과시켜 언론탄압을 더욱 강화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1969년 1월 기자협회보 신년호에 ‘연탄가스에 중독된 언론’이라는 글이 실렸어요. 부지불식간에 스며들어 사람을 죽이던 그때 상황을 가장 잘 표현했던 글이죠. 그거 아세요? 당시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들 가운데 단 1명을 제외하고 나중에 모두 정치인이나 고위 관료가 됐다는 사실 말입니다. 박 정권의 언론통제가 얼마나 집요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죠.”
유신 헌법 이후 심해진 언론 탄압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발표에 이어 10월 유신헌법이 등장하자 언론은 유신체제의 홍보기구로 전락했다. 박 정권은 기자 신분증 발급제도를 통해 행정적인 언론 통제를 강화했다. 기자 신분증을 발급하는 과정에서 권력이 언론인 자격 유무를 사전 심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박 정권은 이어 `‘언론 자율정화’라는 이름으로 언론사를 통폐합하고 언론인을 내쫓았다. 8개 지방지가 3개로 줄어들고 전국 기자 수는 6천3백여 명에서 3천4백여 명으로 감소했다. 1973년 방송법이 개정되어 방송윤리위원회가 자율기구에서 법적기구로 바뀌어 검열기능이 커졌다.
“당시 신문만 보면 사회가 태평해요. 정작 대학가에서는 연일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지만 단 한 줄의 기사도 나갈 수 없었거든요. 오죽했으면 1971년 3월 서울대생들이 동아일보 앞에서 언론 화형식까지 치렀겠습니까. 1972년 10월 유신 뒤에는
한국 언론의 사회사 김영호 지식산업사 2004년
박종만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 인터뷰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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