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전쟁의 서막.
3.전쟁의 호된 시련.
4.전쟁의 와중에서 발발한 혁명.
5.종전과 평화
6.맺음말
지구상에서 인류가 탄생한 이래 지금까지 전쟁이 없었던 날을 꼽아보라면 한달이 채 안된다고 한다. 그만큼 인류사에서는 전쟁이란 하나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으며 인류는 그들의 발달과 욕망, 진보와 욕심을 전쟁이라는 하나의 커다란 힘의 대결로서 표현해 왔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알아 볼 1차 세계대전은 이러한 수많은 전쟁의 소용돌이속에서도 전쟁의 역사, 그리고 이 이후의 전쟁이라는 흐름의 개념을 바꾸어버린 그런 전쟁이었다. 물론 제 1차세계대전이 최초의 세계대전은 아니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에 대항한 전쟁은 이미 유럽대륙의 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1차세계대전은 영토의 다툼이라는 전쟁의 범위를 이미 벗어나 있었다. 1914년에서 1918년 사이에 발발한 이 전쟁은 이전에 치러진 어떠한 전쟁도 훨씬 능가하는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것은 곧바로 군인이나 수병뿐 아니라 민간인까지도 직접적으로 또 전면적으로 참여했던 “인민의 전쟁”이 되었다. 혁명으로 결실을 맺기도 했던 이 전쟁은 미래의 새롭고 더 한층 치명적인 갈등의 씨를 뿌리게 된다. 그것은 20세기 대부분에 걸쳐 계속되었던 폭력의 시대라는 유형을 정착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2. 전쟁의 서막.
제 1차 세계대전의 직접적 원인은 ‘프란츠 페르디난트’ 즉 오스트리아 대공의 암살이었다. 프란츠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가 될 인물이었다. 따라서 제위 계승자를 암살했다는 것은 제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된 중대한 사건이었다. ‘검은 손’ 으로 불리는 이사건의 배후 음모자는 “통일이냐 죽음이냐”라는 이름의 비밀결사 조직원들로서 이들은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이 암살사건을 계획하게 된다. 이들이 암살사건을 계획한 이유는 프란츠 대공이 슬라브인이 거주할 준독립지역을 만들려고 하였고 이 계획이 실행되면 슬라브인들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통치를 받아들일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암살사건이 벌어지자 오스트리아 정부는 즉각적으로 이 암살의 배후에 세르비아 정부가 개입되어 있다고 확신했다. 혐의를 잡은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게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하려고 하였고 7월 23일 11개의 요구조건이 담긴 엄중한 최후 통첩을 급송했다. 이 통첩을 받은 세르비아 정부는 1가지는 단호히 거부, 5가지는 무조건 수락되었다. 그러나 이런 호의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 정부는 만족할수 없다고 하였으며 군대를 동원하였다. 또한 세르비아도 러시아의 지지를 믿고 있었도 오스트리아에게 아부할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회답을 보내기 세시간 전에 이미 세르비아도 군대에 동원령을 내린 상태였다. 세르비아의 응답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비협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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