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분단과한국전쟁] 정전협정의 체결과 전쟁이 가져온 피해
2. 평화의 도래와 남로당계의 재판
3. 전쟁이 가져온 피해
1. 정전협정의 체결
1953년 3월 30일 저우언라이 수상의 포로 인도 문제에 관한 새로운 제안으로 그동안 중단되었던 정전회담이 재개되어 타협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태도 변화와 정전회담의 타결에는 스탈린의 갑작스러운 죽음의 영향과, 미국 대통령이 군인 출신의 아이젠하워로 바뀌면서 원폭의 사용이 논의되고 있었다는 상황이 영향을 주었다. 죽기 전에 스탈린도 평화공존을 강조하면서 한국전쟁의 책임을 물어 박헌영을 체포하는 등의 전쟁 수습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내부적으로도 전쟁이 계속될 경우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타협할 기회를 보고 있었던 중국은 2월 22일 클라크의 부상포로에 대한 교환 제의가 있자, 중국은 귀환을 바라는 포로는 정전과 동시에 인도하고 나머지 포로는 중립국으로 인도하기로 하는 중대한 양보를 하며 화답한다. 저우런라이의 제안이 중대한 전환점이 되어, 정전협상을 재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결과에 이승만 정부는 중국군의 철수, 북한군의 무장해제 등의 조건을 제시하며, 정전에 반대하였다. 그는 미국에 대해 전쟁을 계속하고 그것이 안 되면 전후 한미안전보장조약 조인을 요구한 것이다.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미국은 저항적인 이승만을 쿠데타로 제거할 방안까지 계획하고 있었다. ‘에버레디‘라고 불리는 이 계획은 이승만의 반대 입장이 꺾인 것으로 판단되어 실행되지는 못하였다.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의 정전반대 입장을 우려해서 안전보장 약속을 검토하였다. 5월 25일 정전 회담에서는 송환을 원하지 않는 포로는 스웨덴, 스위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인도 등 5개국으로 구서오디는 송환위원회를 통해 포로의 의사를 확인하여 석방한다는 내용을 미국이 제안하였다. 이러한 제안을 중국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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