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S교육] 노드스트롬 백화점의 고객관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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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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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 차

노드스트롬 신화의 시작

반면교사가 된 대기업 경험

고객 앞에서 무릎꿇고 하는 서비스

역피라미드 조직구조

4세대에 걸친 100년 화목경영

기업문화 차원의 내부승진 정책

미국에서 가장 짧은 직원 복무규정

노드스트롬에 입사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조건없는 반품수용 정책

개인별 고객수첩의 활용

노드스트롬의 신화는 막을 내리나?

노드스트롬의 사례가 주는 교훈

리더십의 궁극적 표현은 권한위임이다

정보기술로부터 고립되지 말라


서비스 경영 우수사례 - 신세계백화점

회진 시스템으로 서비스 장애요소 제거

직무 올림피아드, 친절왕 선정으로 동기부여

신세계가 제공하는 특별한 서비스





본문내용
노드스트롬 백화점의 고객관 사례
노드스트롬(Nordstrom Inc.)
 
스웨덴 이민자 존 노드스트롬(John W. Nordstrom)이 세운 미국 5대 백화점 체인 중 하나. 노드스트롬이 처음 미국에 왔을 때 그의 수중엔 단돈 5달러 밖에 없었으며 영어는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금광에서 광부로 일하며 번 돈으로 친구와 1901년 신발 상점을 오픈, 이것이 오늘날 노드스트롬 기업의 시초가 된다. 최상의 질을 자랑하는 노드스트롬의 신발은 엄청난 인기를 끌어 전국으로 지점을 넓혔고, 1963년엔 옷 장사에 뛰어들어 사업을 확장한다. 이후 주변의 소매상점들을 인수하면서 노드스트롬은 패션 의류 전문 백화점으로 거듭난다. 이곳 백화점 직원들의 근무 수칙은 단 두 줄이다. "모든 상황에서 스스로 최선의 판단을 내릴 것! 그 외의 다른 규칙은 없음." 이 백화점의 "극단적으로" 친절한 고객 서비스는 기업 문화처럼 굳어져 따로 친절히 하라는 지침이나 교육이나 규정을 주지 않아도 모든 직원이 알아서 친절을 베푼다고 한다. 이곳에서 고객이 사간 물건은 거의 아무런 조건 없이 100% 환불 되며, 바겐세일 기간 동안 물건이 바닥났을 경우 경쟁사 백화점에서 제값에 사온 뒤 세일 가격으로 제공한다. 이들은 심지어 백화점 내에 팔지도 않는 타이어를 환불해 준적도 있으며, 노숙자 여자에게 무료로 비싼 드레스를 입혀 내보내기도 했다. 직원들은 아예 고객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해 하루 종일 외근을 나가는 경우도 있으며, 필요할 경우 그 자리에서 손님 옷을 다림질 해주거나, 배송이 조금이라도 늦을 경우 여지없이 사과 편지와 함께 다른 물건을 덤으로 얹어 주기도 한다. 그 결과, 이 백화점에선 명절이나 밸런타인데이만 되면 고객들이 마음에 드는 직원들에게 초콜릿 등의 선물을 선물해 주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이런 노드스트롬의 고객 서비스는 이미 책이나 강연 등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으며, 전 세계 고객 서비스의 우수 사례로 매번 빠짐없이 언급되고 있다.
 
노드스트롬 신화의 시작
미국 내 대다수 백화점의 창립자들처럼 노드스트롬의 창립자인 존 노드스트롬도 이민자였다. 1871년 2월 15일 그는 스웨덴의 북부지역에서 다섯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여덟 살 되던 해 대장장이였던 아버지가 사망하자, 그는 학교도 그만두고 농장에서 고된 생활을 했다. 16세가 되던 1887년 겨울 존은 고향마을을 떠나 희망과 기회의 땅 미국을 향한 장정에 나섰다. 이틀 동안 배를 타고 스톡홀름에 도착하여, 배를 갈아타고 3일 후 영국의 동부 해안도시 헐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난생 처음으로 기차를 타고 영국의 대 항구 리버풀로 갔다. 리버풀에서 미국으로 가는 선박의 3등실에 몸을 실은 그는 열흘 후 뉴욕의 엘리스 섬에 도착하였다. 영어도 한 마디 못하던 그가 도착시 가지고 있던 돈은 5달러가 전부였다. 그는 철광석을 화물차까지 손수레로 날라 싣는 일자리를 얻었다. 하루 10시간동안 중노동한 대가는 고작 1달러 60센트였다. 쏟아 내리는 철광석 더미에 목숨을 잃을 뻔 한 위험을 겪으면서도, 강한 인내로 5년 동안 노력한 결과 서부로 이주할 수 있었다. 그동안 미시간에서 벌목공으로, 아이오와에서는 광부로, 캘리포니아에서는 철도공사 노동자로서 온갖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1896년 이렇게 땀흘려 저축한 돈으로 존은 시애틀에서 북쪽으로 80㎞ 떨어진 워싱턴 주 알링틴의 스웨덴계 이민자 거주 지역에 감자농사를 지을 수 있는 강변의 저지대 땅 8헥타르를 살 수 있었다. 알래스카 밸디즈 항에 도착한 후 클론다이크 황금지대의 중심에 있는 신흥마을 도슨으로 가는 1,609㎞의 험난한 여정에 올랐다. 추위와 눈, 비, 폭풍, 바람에 시달렸고, 말은 도중에서 죽었다. 얼어붙은 클론다이크 강 위를 걸어서 거의 1년 반만에 작은 마을 도슨에 도착하였다. 2년간 존 노드스트롬은 닥치는대로 허드렛일을 하면서 버텼다. 마침내 그는 수익성이 상당히 클 것으로 생각되는 금맥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기뻐할 틈도 없이 다른 광부가 권리를 주장하고 나섰다. 당시 이러한 권리 분쟁은 흔히 있는 일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분쟁의 해결을 맡은 금광 감독자가 노드스트롬에게 도전한 자의 형이었다. 그곳의 타락상을 익히 알고 있던 노드스트롬은 중재 재판에서 이길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권리를 13,000달러에 팔았다. 노드스트롬으로서는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이 돈을 손에 쥐고 그는 시애틀로 돌아왔다. 1900년 5월 존 노드스트롬은 알래스카로 가기 전에 청혼했던 스웨덴 아가씨 힐다 칼슨과 결혼했다. 둘은 새로운 사업을 모색했다. 존은 클론다이크에서 사귄 친구인 월린을 찾아갔다. 구두수선 가게를 운영하고 있던 월린은 구두판매점을 열자고 제의했다. 노드스트롬이 5,000달러, 월린이 1,000달러를 투자하여 월린 앤드 노드스트롬(Wallin & Nordstrom)이라는 가게를 열었다. 1901년 시애틀 중심가에 개점한 이 가게에서부터 노드스트롬의 역사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