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문혁의 시작
문혁은 일반적으로 요문원의 논문 이 상해의 문회보에 발표됨을 그 시작으로 보고 있다 . 사실 북경 부시장 오함의 은 모택동의 뜻에 맞추어 쓰여졌다고 보는 것이 맞는데,그 내용 속에 을 單幹風, 飜案風과 연결지어, 이것이야말로 당시의 [프롤레탈리아 독재와 사회주의 혁 명에 반대하는 부르조아지 투쟁의 촛점이다] 는 해석과 이것이 곧 계급투쟁의 반영이라는 혁명파의 주장에 의해 문혁의 도화선 이 된 것이다.5)
이 요문원의 논문을 계기로 문화예술계 각 부문의 수정주의와 계급투쟁의 요소들이 철저한 비판을 받게 되고 점차적으로 사회 전반으로의 확대 조짐이 일기 시작한다. 이에 대해 실권파는 팽진 등이 이끄는 문화혁명5인소조를 통해 이 논쟁을 학술문화면에 만 한정시키 위해 [2월 요강] (기본적으로 모택동사상과 그의 혁명노선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는 것을 대전 제로 내세우고 오함의 해서파관에 대한 비판을 본질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모택동사상을 한쪽편으로 하고 자산계급의 사상 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대투쟁이라고 규정하였다. 즉 그것은 중국에서 무산계급이 정권을 잡고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하게 된후에 자산계급과 기타반동들의 잘못된 사상을 청산하기 위한 학술영역의 투쟁이라고 단정함) 을 발표한다.하지 만 강청,임표로 대표되는 혁명파는 상해에서 인민해방군 부대의 문학,예술활동에 대한 좌담회를 갖고 그 좌담 회 내용을 정리 하 여 [좌담회 기요]를 발표하여 문화예술계 내에 첨예한 계급투쟁의 존재와 부르조아의 문학예술사상,현대 수정 주의 문학예술사상 의 독재를 비판하며,이러한 문제를 사회전반으로 확대를 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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