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역사] 문화대혁명의 전개
문혁의 전조는 경제 회복기에 이미 나타났다. 1962년 모택동은 중국공산당 8시 10중 전회에서 '과도기 계급투쟁이론'을 제기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간의 지속적인 투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즉 국내의 조정정책으로 자본주의적인 요소가 부활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나 나타난 것이었다. 이어 사회주의 교육운동이 벌어졌고 농촌에서는 이 운동의 일환으로 부패하거나 독직을 저지른 지방정부 간부들과 과거 지주나 부농의 자식으로 당 간부와의 친분을 이이용해 권력을 다시 얻게 된 사람들을 비판, 숙청하는 사청四淸운동이 벌어졌다. 이상주의적인 청년 활동기들을 훈련해 공작대로 만든 뒤 이들이 각지의 빈농을 조직해 지방정부의 권력을 빼앗고 부패 간부를 조사하는 방식은 거의 문혁 때의 조반造反과 유사했다. 건국 이후 15년이라는 오랜 기간 지방의 권력을 쥔 사람들이 부패했을 것이란 전제하에 영구혁명론을 실천에 옮긴 것이었다. 도시에서도 기업마다 사회주의 정치체제를 가르치고 공산주의 청년단을 조직하는 사회주의 교육운동이 이루어졌다.
조정정책을 담당한 유소기, 등소평 등의 권한이 강화되면서 모택동은 이들이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실권파[주자파走資派]이자 수정주의의 길을 걷고 있는 소련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실권파로부터 권력을 탈환하려는 문혁이 1965년부터 시작되었다. 이해 11월, 나중에 문혁 4인방으로 유명해진 상해의 요문원姚文元이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함』이란 평론을 썼다. 『해서파관』의 필자는 북경 부시장 오함으로 그 내용으로 황제에 의해 파직된 명대의 청렴하고 충직한 관리 해서를 높이 평가한 것이었다. 그런데 요문원은 해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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