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상] 일본의 난학에 대하여
일본의 난학은 처음에는 포르투칼 상선이 1543년 種子島에 표착하여 총을 전래하고 1549년 사비에르(Francisco Xavier)가 가고시마에 상륙하여 기독교를 전하였다. 그 후 기독교의 유포와 포르투칼과의 무역으로 서양과의 접촉이 활발해졌다. 그에 따라 포르투칼이나 스페인의 서양학을 남만학이라 불렀는데 이것은 쇄국령이 선포되어 내항이 금지되는 1639년까지 약 80년간에 걸친 일본에서의 서양연구였다. 그러나 이 쇄국령은 기독교인 포르투칼이나 스페인에 대해서였지 비기독교 국가인 네덜란드에 대해서는 무역활동과 내항을 허락하였다. 즉, 양학의 理적 측면인 기독교를 거부한 것이지 器적 측면인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이후 일본은 長崎라는 하나의 대서양 창구를 통해 쇄국정책을 유지하게 된다. 일란교섭의 시작은 1600년 3월 다 리프데호의 도착으로 시작되며 1609년에 호란 동인도 화사의 일본 상관이 九州의 平戶에 설치되었고, 33년후인 1641년에 長崎의 出島로 이동된다. 이후 이곳은 쇄국 일본의 유일한 대서양의 창구가 된다. 長崎를 통해서 네덜란드의 문물, 즉 서양의 문물이 들어오게 되고 이러한 것이 학문으로 전환하면서 난학을 이루게 된다. 난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大槻玄澤이 『蘭學階梯』이다. " 난학이란 즉 화란의 학문이며 阿蘭陀(아란타)의 학문을 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또한 이러한 난학의 시작에 대해 衫田玄白은 『蘭學事始』의 하의 권 제 22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崎에서 시작된 난학은 화난상선을 통한 끊임없는 지식의 공급을 통해 계속해서 성장해 나갈 수 있었으며, 江戶에 까지 이어지게 된다. 長崎에 체제하는 네덜란드 상관장의 江戶參府나, 長崎에 거주하던 통사와 그 자손들 그리고 의술을 배우기 위해 모여든 의사, 그리고 長崎로의 遊學등은 지방확산을 가능케 했으며 그 습득계층 또 다양하다.
일본의 난학은 1609년 平戶에 네덜란드 상관이 설치되면서부터 시작되는데 일본역시 1612년 기독교 금지령을 시작으로 쇄국의 길을 가게 된다. 1633년에는 1차 쇄국령이 내려지고 1639년에는 포르투칼선의 내항을 금지하는 5차 쇄국령에 이른다. 이리하여 일본과의 교역이 허락된 나라는 비카톨릭 국가인 네덜란드 뿐이었다. 이어서 막부는 1641년에는 네덜란드의 상관을 出島로 옮기게 된다. 出島를 시작으로 江戶까지 난학은 확산되어 간다. 처음에는 화란통사들을 중심으로 난학이 발달하게 되는데 이들 통사들은 出島로 이동하기 전인 平戶시절부터 있었다. 통사들은 직무상 네덜란드어를 할 수 있어야 했다. 이들은 대를 이어가며 네덜란드어를 배웠으나 쇄국정책에 의해 그들의 문자를 배울 수 없었고, 단지 구전에 의해 배웠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1745년 德川吉宗에 의해 문자를 배울 수 있도록 허가받음으로써 난학의 발전이 일로에 섰다고 말할 수 있다. 통사들이 자신들의 직무상의 어려움을 토로하면서 네덜란드의 말은 배우되 문자를 배울 수 없으므로 그들에게 속아도 방법이 없음을 얘기하고 그것을 상부에 요청하여 허가받아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네덜란드인들이 도착한지 100년정도 후의 일이다.
언어학습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문법을 연구하는 통사도 나오게 되었다. 즉, 志筑忠雄의 『和蘭語品考』가 그것이다. 1790년에는 江

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