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답사 내용
2. 을미사변, 당시의 시대 상황
3. 을미사변과 관련된 열강의 시선과 입장
① 청
② 러시아
③ 일본
4. 을미사변의 의미
흥선대원군은 일본의 요구에 따라 경복궁으로 들어온 뒤 거의 유폐되다 시피했다. 즉, 이용만 당하고 자기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했다고 합니다. 일본 공사 마우라의 계획 중 하나는 바로 '왕비를 제거하되 대원군을 그 주모자로 내세운다' 였다. 그리고 을미사변 직 후 마우라의 처음 주장은 '대원군과 훈련대의 주모'였다. 이러한 마우라의 각본에 따라 일본 측에서는 대원군을 궁궐로 끌어내려고 했으나 이에 시간을 너무 지체하는 바람에 어둠 속에서 완전범죄로 해치우려던 완비 시해 계획은 날이 밝아오는 새벽녘에 이루어져서 예상치 못한 목격자들이 생기게 되었다.
자, 그렇다면, 훈련대 관련설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자. 훈련대 군인 40여명은 우범선, 이두황의 지시에 따라 이유도 모른 채 현장에 동원되었고 정작 경복궁 안에서는 무기마저 땅에 내려놓은 채 정렬해 있었다 하고, 실제로는 훈련대를 동원한 것이 아니라 일본군에게 그들의 옷을 입혀 정렬시켜 놓았다고도 한다.
3) 을미사변과 관련된 열강의 시선과 입장
① 청
청은 서세동점의 직전, 즉 19세기 중반대까지 세계적인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였다. 이는 명, 청조에 들어 조세의 은납화가 점진적으로 진행되면서 중국의 은 수요가 폭증하면서 전 세계의 은이 중국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당시 청은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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