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외관계의 전개
2. 고구려 vs 수나라
3. 고구려 vs 당나라
4. 고구려 대외 전쟁의 意義
618 당나라 등장.
- 초기의 고구려와의 관계는 우호적 (포로 1만명 송환)
- 연개소문의 등장 이후 당이나 신라에 강력한 대외 정책을 시도
- 신라에 대한 공격 중지를 권하는 당의 간섭 거부
- 당 태종 즉위 이후 고구려에 대한 압력 행사 → 고구려 침략 (645)
안시성 싸움 “..645년 군대를 직접 이끌고 쳐 들어온 당 태종은 사생결단하고 전력을 다해 막아내는 안시성은 쉽게 함락시킬 수가 없자 새로운 전투방법을 채택한다. 안시성의 성곽 높이와 비슷한 규모로 토산을 쌓은 다음 점차 성벽으로 접근시켜 군사들이 한꺼번에 성안으로 넘어들어 갈 수 있도록 한다는 공격대책이었다. 60일간 연인원 60만 명을 동하여 안시성 동남쪽 모퉁이에 쌓은 토산은 성 안을 내려다 볼 수 있을 정도로 성으로 접근해 왔다. 안시성의 고구려인들도 이에 맞서 당 군의 토산 높이에 따라 성벽을 높여 당 군이 성 안을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이렇게 양쪽 군사들이 경쟁적으로 토산과 성벽을 자꾸만 높여 나갔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갑자기 토산이 허물어지면서 안시성의 동남쪽 성벽을 덮치는 바람에 안시성의 성벽 일부도 무너졌다. 이 틈을 이용해 우리 군사 수 백 명이 성이 허물어진 곳으로 쏟아져 나가 싸워서 토산을 지키고 있던 당나라 군사를 격멸하고 순식간에 토산을 점령해 버린다. 당나라 군이 막대한 시간과 인력을 투입하여 구축한 토산이 한 순간에 우리 손에 들어와 거꾸로 당 군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고구려 군의 망루가 되어버린 것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당 태종은 책임자의 목을 베고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당 군이 총력을 다하여 3일간을 공격하였지만 막대한 인원과 장비만 손실하고 끝내 토산을 탈환하지 못한다. 9월 18일 드디어 당 태종은 철군을 명령한다...”
“… 세적은 드디어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이 황제의 깃발과 일산을 바라보고, 즉시 성에 올라 북을 두드리고 함성을 지르니 황제가 분노하였다. 세적은, 성이 함락되는 날 안시성의 남자를 모두 구덩이에 묻어 버릴 것을 황제에게 요청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더욱 굳게 수비하였다. 당 나라 군사가 오랫동안 공격하였으나 안시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
(삼국사기 권 제21, 고구려 본기 제9, 보장왕 4년)
고구려 대외정책의 변화
: 연개소문의 집권 후 강경한 대당 정책 추진, 천리장성의 축조 (부여성~비사성) (631~647)
*원인 : 고구려의 강경책, 당 태종의 지배욕, 연개소문의 집권과 천리장성의 축조
*구실 : “연개소문의 집권을 문책한다.”
*경과 : 당 태종의 침략(645)→요동성, 백암성 함락 → 안시성 공격
*결과 : 양만춘의 활약으로 안시성 전투 승리(645)
김철준, 최병원 - 『사료로 본 한국 문화사-고대편』(일지사, 1986)
삼국사기 번역문 허성도 역 (http://www. krpia. co. kr)
이기백 - 『한국사 신론』((주)일조각, 1999, pp63~66)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 (http://db.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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