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논란이 되었던 시사적 이슈를 통한 문제제기, 임나일본부설 탐구 이유
Ⅱ. 본론
1. 임나일본부설의 의미
① 기본개념
② 성립과정과 주요내용
2. 고대 한․일 관계
① 고구려와 왜의 관계
② 백제와 왜의 관계
③ 신라와 왜의 관계
④ 가야와 왜의 관계
3.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일본학계의 주장과 근거
① 출선기관설
② 가야의 왜인설
③ 광개토왕릉비 비문
4.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국내 학자들의 주장과 근거
① 분국설
② 백제군사령부설
③ 외교사절설
④ 칠지도
5. 임나일본부설의 문제점
① 『일본서기』
② 광개토대왕릉비
③ 가야 부재의 임나일본부설
Ⅲ. 결론
향후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연구 과제
참고문헌
가야지역 특히 금관가야의 전신인 狗那韓國(한국)(구나한국)은 이미 기원전부터 왜의 대중국교섭의 중간 기착지로서 역할을 한 것이 삼국지 위서 왜인전 등에 의해서 확인되는데, 이는 가야가 일찍부터 왜와 활발한 관계를 가져왔음을 시사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삼국지 한조의 “나라에 철이 나서 韓․濊․倭(한․여․왜) 가 모두 이를 얻어간다”는 내용으로도 뒷받침된다. 그리고 김해 池内洞(지내동) 옹관묘에 부장된 袋狀口綠土器(대상구록토기), 김해 부원동 패총에서 나온 二段口綠形土器(이단구록형토기) 등도 김해지역과 왜와의 교류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양 지역에 소국가가 분립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이와 같은 교류는 4세기에 들어서면서 중대한 변화를 일으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먼저 일본열도에서는 아직 지방 세력이 잔존하기는 하지만 야마토왜 야마토 시대(大和時代)는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현재 나라 현의 아스카 촌을 중심으로 일본을 다스리던 국가 형성, 확립의 시대(250년–710년)이다. 고훈 시대와 아스카 시대를 합해서 일컫는다. 아직 일본이라는 국명을 사용하진 않았으며,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왜(倭)라고 불렀다.
가 우위를 확립한 후 서일본까지도 그 세력 하에 편입시킴으로써 일본열도 내에 있어서 가야의 주교섭대상으로서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가야지역에서도 구나한국이 금관가야로, 다시 말하면 삼한 소국단계에서 가야로 전환되는데 이 과정에서 김해지역을 중심으로 국가 간의 통합이 가속화되고 금관가야가 그 중심적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가야지역에서 우월한 지위를 확보한 위에 전대부터 왜의 대중국교섭의 중각 기착지로서의 역할을 해왔던 구나한국을 계승한 만큼 금관가야가 야마토왜의 한반도에 있어서의 주 교섭대상으로 등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4세기 들어서면서 양 지역에서 통합이 가속되어감에 따라 필연적으로 지금까지의 산발적인 교류는 점차 정치적인 관계로 전환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금관가야를 위시한 가야 제국이 언제부터 야마토왜와 정치적인 목적의 교섭을 갖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에 대한 시사적인 내용이 에 보인다. 이 비문에 의하면 400년과 404년에 왜가 한반도에 침입하여 고구려와 싸운 것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지리적으로 보아 야마토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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