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통합과정
임시정부 제1기
민족 유일당 운동
임시정부 제2기, 제3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의
참고문헌
러시아 지역에 무려 20만 명의 동포 들이 거주하고 있었음, 2월 25일부터 3월 초까지 러시아와 중국 만주, 국내에서 모여든 80여 명 대표들이 국내의 3·1 운동 소식을 들으며 정부 조직체 건설을 추진. 1918년 6월 조직되어 이 지역 한인사회를 총괄하던 전로한족중앙총회가 주역이 되어 1919년 2월 25일 니콜리스크(연해주)에서 전로한족중앙총회 상설위원 15명으로 국민의회를 조직. 상설위원회가 잠시 ‘임시국민의회’ 기능을 맡고, 장차 독립을 이루는 날에 임시대통령을 선출하여 임시정부를 운영하겠다는 취지 발표, 의장을 선출, 별도의 행정부를 조직하여 손병희를 대통령에 추대, 대한국민의회가 표면에 등장한 때는 3월 17일로 2월 25일 구성, 3·1운동이 나라 안팎으로 널리 퍼져가던 3월 17일에 니콜리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세운동과 함께 정부 수립이 선포됨.
상하이 – 상하이 임시정부 (1919. 4)
상해에 3·1운동 직후 신한청년당의 대표자, 일본에서 2·8독립운동을 준비한 사람, 국내의 3·1운동의 주역들이 파견한 사람이 참가하는 독립 임시 사무소를 설치함. 국내에서 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소식에 자극을 받고 의견 차이가 있는 대한국민의회를 견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상해에서 정부수립을 서두름. 4월 10일 임시의정원을 구성, 정부 수립 작업을 추진, 국무총리를 수반으로 삼고 국무원에 6부를 두도록 결의, 국무총리에 이승만, 외무총장에 김규식 등을 임명,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됨.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제를 선언하고 대의제를 채택함.
서울 – 한성 정부 (1919. 4)
- ‘국민대회’ 준비, 전국13도를 대표할 ‘국민대표’로 조직 되어야 하고 정부형태는 민주공화정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요구됨. ‘비밀독립운동본부’를 조직, 3월 17일 정부수립에 대한 구체적인 절차와 방법을 논의. 집정관총재에 이승만, 국무총리총재에 이동휘를 임명. 4월 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13도 대표자 회의를 열게 됨, 4월 23일 개최된 국민대회는 서린동 춘추관에서 국내 13도 대표자가 모여 임시정부를 선포, 노동자를 동원, 종로 보신각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고 문서를 배포하려 하였으나 실제 시위규모는 계획보다 작았고 이 사건으로 270명이 검거됨. 한성정부가 조직되었다는 소식은 국민대회 이전에 중국 신문에 보도, 한성정부의 성립사실은 국민대회 직후 기독교세력과 국내 민족 운동계에 알려지고 해외 한인사회에까지 널리 퍼짐.
임시정부가 수립된 곳은 연해주, 상해, 서울이었으나 전단정부까지 합치면 7개의 정부가 공표되었다. 정부조직의 부서를 살펴 보면 한성정부가 가장 짜임새 있었으며, 세 정부 모두 실질적 수반은 이승만이었고 안창호, 김규식, 이동휘는 세 정부에 모두 입각하고 있다.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23 대한민국임시정부Ⅰ-상해시기 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 08 우사 조동걸 저술전집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3&dirId=130102&docId=112423940&qb=7J6E7Iuc7KCV67aAIOydmOydmA==&enc=utf8§ion=kin&rank=2&search_sort=0&spq=0&pid=gIhN%2BF5Y7uVssvEfbOdssc--453975&sid=T6YVnEkUpk8AAClKBSw
-강만길, 고쳐 쓴 한국 근현대사
- 한국독립운동사강의,한울아카데미

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