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시대적 배경
Ⅲ.조광조의 생애
Ⅳ.조광조의 국정개혁론
1. 국정개혁의 기본적 시각 - 유교적 변개론
2. 유교적 정치이념의 정립
(1) 폐비 신씨 문제
(2) 소격서 철폐론
3. 국정개혁의 기반
(1) 향약
(2) 현량과
4. 국정운영 주체의 정비 - 위훈삭제론
Ⅴ.조광조의 정치 리더십
Ⅵ.마치며...
조광조는 기묘사화 이후 영의정 정광필의 적극적인 비호로 목숨을 건지고 전라도 능주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그 후 정권을 주도하게 된 훈구파 김전․남곤․이유청 등의 주청으로 기묘년 12월에 사사되었다. 조광조는 사약을 받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자신의 감회를 피력하였다.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고
나라 걱정을 내 집 걱정하듯 하였노라
밝은 해가 이 세상을 내려다보니
나의 붉은 마음 환히 비추리
그는 오직 나라의 발전만을 생각하며 온힘을 다해 국정개혁을 위해 노력했으나 그 수고는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아버지처럼 믿고 따르던 중종의 배신을 받으며 쓸쓸히 사라져 갔다. 그러나 그의 육체는 사라졌지만, 그의 정신만은 후대에 전해 내려져 퇴계나 율곡, 조식과 정인홍, 송시열과 정약용까지 이어져 우리나라의 올곧은 선비정신을 만들었다.
조광조의 어떤 모습이 그토록 후대의 학자들의 스승으로 추앙받게 하였는지 알아보고, 우리시대에 필요한 조광조의 정치 리더십에 대해 살펴보자.
Ⅱ.시대적 배경
조광조가 살던 16세기는 15세기 이래 정권의 주도권으로 장악해왔던 훈구세력과 새롭게 등장한 사림세력과의 정치적 갈등이 본격화된 시기이기도 하여 정국은 두 세력간에 일촉즉발의 폭풍전야와 같았다. 훈구파는 공신이라는 특권적 정치세력으로서 주요 관직은 물론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훈구파의 영향으로 중소 지주층은 중앙관직으로의 진출이 어려워졌으며, 중앙 훈구세력들의 권력에 의한 피해도 나날이 늘어났다.
그에 따라 성종은 차차 자신의 왕권확립을 위해 지방의 중소 지주계층의 중앙정계 진출을 지원하였다. 이들은 점차 사림파라는 정치세력으로 형성되어 갔다. 사림파들은 학문에 몰두하여 과거급제를 통해 차차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 홍문관에서 대간(臺諫)으로까지 점차 영역을 넓혀갔다. 이들이 언론을 통해 세력을 넓혀나가고 점차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자 훈구파들의 견제가 있게되고 결국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사림세력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폭압을 일삼던 연산군이 축출되는 1506년의 중종반정은 사림파에게도 새로운 정치적 진출을 꾀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써 엉겁결에 남의 등에 업혀 군주가 된 중종은, 아무런 힘이 없어 반정공신들에 의해서
최락도, 우리 시대에 조광조가 있다면 (푸른샘, 2002)
부남철, 조선시대 7인의 정치사상(사계절, 1996)

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