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중세사] 백년전쟁
Ⅱ.백년전쟁과 변화들
Ⅲ. 백년전쟁 이후의 프랑스와 영국의 변화들-중앙집권적 국민국가의 성립
참고문헌
영국과 프랑스는 14세기에 이르러 이미 봉건적 주종관계에 따른 질서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보다 강력한 국왕권을 신장시키려 노력했다.
거기에 백년전쟁이 시작될 무렵 프랑스인은 국민적인 공감대가 폭넓게 형성되가고 있었고 영국 또한 왕실과 상류층이 플랑타주네(플란타지네트)가가 왕위를 계승한 이래 급속히 프랑스 문화에 동화되어갔다.
그러나 영국은 1066년 노르만왕조의 성립 이후 프랑스 내부에 영토를 소유하였기 때문에 양국 사이에는 오랫동안 분쟁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1328년 프랑스 카페왕조의 샤를 4세가 남자 후계자가 없이 사망하자, 3명의 프랑스왕 후보자-이사벨라의 아들이자 영국왕 에드워드 3세, 발로아가의 필립3세의 손자인 필립 드 발로아, 루이 10세의 사위인 필립 데브르-중에 그의 4촌 형제인 발루아가(家)의 필리프 6세가 프랑스 태생이란 이유로 삼보회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이로인해 카페왕조가 끊기고 발로아 왕조가 출발하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그의 모친이 카페왕가 출신(샤를 4세의 누이)이라는 이유로 프랑스 왕위(王位)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프랑스에선 모계혈통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를 무시함으로서 양국간에 심각한 대립을 빚게 되었다. 그러자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경제를 혼란에 빠뜨리기 위하여 플랑드르 사실 당시 영국의 농업과 플랑드르의 모방직에 관련된 공업은 상호 의존관계를 유지했으며 플랑드르의 백작 루이 드 네베르는 프랑스 왕실과 친분을 유지한데 반면 플랑드르의 도시상인과 시민들은 경제적인 이권 때문에 영국에 보다 우호적이었으며 특히 플랑드르 상인들은 에드워드 3세에게 프랑스와의 전쟁시 반역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했다.
에 수출해오던 양모(羊毛) 공급을 중단하고, 그 보복으로 프랑스의 필리프 6세는 프랑스 내의 영국 영토인 기옌, 지금의 가스코뉴 지방의 몰수를 선언하였으며, 1337년 에드워드 3세는 필리프 6세에게 공식적인 도전장을 띄우게 되었다.
케임브리지 프랑스사- 시공사
옥스퍼스 영국사- 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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