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에 대하여
18세기에는 철학적 입장뿐 아니라 예술의욕 역시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의 서로 상반되는 사조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되어, 어느 시기에는 엄격한 고전주의적 관점에 접근하는가 하면 또 다른 시기에는 매우 자유로운 회화적 관점에 접근하기도 했다. 또 이 시대의 고전주의 역시 합리주의와 마찬가지로 좀처럼 정의하기 힘들고 사회학적으로 다의적인 현상이어서, 때로는 궁정적귀족적 계층이, 때로는 시민적 계층이 번갈아 주도하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혁명적 시민계급의 대표적인 예술양식으로 발전하였다.
꼬르네유 다음 시대에는 궁정예술에서 고전주의의 냉철하고 청교도적인 경향들이 점점 더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는데, 그 까닭은 그 엄숙주의와 병행해서 모든 것을 더욱 화려하게 꾸미려는 욕구가 다시 일기 시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세기의 예술관 전체에 하나의 전환이 이루어짐으로써 더 자유롭고 더 감각 주의적인 바로끄적 경향들이 득세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해서 프랑스 예술과 문학에는 고전주의적 경향과 바로끄적 경향의 기이한 병렬과 혼합이 이루어지고, 이 결과 그 자체가 하나의 모순이라고 할 수 있는 양식인 바로끄 고전주의가 생겨난 것이다.
1750년경, 새로운 고전주의는 지금까지의 어떠한 고전주의보다도 더 엄격하고 냉철하며 더 계획적이었고, 종래의 어떤 고전주의보다도 더 철저하게 형식의 압축, 직선적인 것과 구성적인 것들을 추구했으며, 또 어느 때보다도 더 전형적인 것과 규범적인 것을 강조하였다. 어떠한 고전주의도 이 고전주의만큼 명백한 성격을 띠지는 못했는데, 왜냐하면 종래의 고전주의는 엄격한 계획적 성격과 로꼬꼬의 해체를 겨냥한 파괴적 의지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고학적 고전주의’라고도 불리는 이 새 운동은 이와 비슷한 지금까지의 예술경향들보다 더 직접적으로 그리스로마 예술의 고전체험에 의존하고 있다. 이 경우에도 고대에 대한 학문적 흥미가 먼저 생겨서 그것이 새로운 예술사조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이미 취미의 변화가 있었고, 또 이러한 취미의 변화는 그것대로 삶의 가치들의 변화를 바탕으로 일어났던 것이다.
1780년경까지의 고전주의는 대체로 궁정적 예술과 이론적 논쟁을 벌이는 데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로꼬꼬가 극복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1980년 이후, 특히 다비드 등장 이후이다. 대략 1780~1800년의 기간에 걸친 혁명시대의 예술과 함께 고전주의의 새로운 단계가 시작된다.
18세기 역시 실제적 목적의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예술을 이용하였다. 하지만 혁명 이전에는 예술의 이러한 실제적 목적은 예술가들에게 거의 의식화 되지 않았고, 더구나 이러한 실제적 목적은 예술가들에게 거의 의식화되지 않았고, 더구나 이러한 실제적 목적으로부터 하나의 강령을 만든다는 일은 그들로서는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혁명과 더불어 처음으로 예술은 정치적 신조가 되었고, 이때부터 예술은 ‘사회라는 구조의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사회적 토대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매우 강조되었다.
낭만주의 역시 그 이전의 유사한 운동에 근거를 두고는 있지만, 전기 낭만주의와 본래의 낭만주의는 근대 고전주의의 두 형식이 가지고 있던 만큼의 공통점도 갖고 있지 않다. 전기 낭만주의와 본래의 낭만주의는 그 발전과정에서, 이를테면 중간에 잠깐 중단되었을 뿐 전체적으로는 지속적으로 발전했던 하나의 통일적 성격을 지닌 낭만적 운동이 아니다. 전기 낭만주의는 혁명을 통해 다시 재기할 수 없을 정도의 결정적 패배를 맛보았다. 비합리주의는 혁명 이후에도 다시 소생했지만, 18세기의 감수성은 혁명 이후까지 살아 남지 못하였다. 혁명 이후의 낭만주의는 새로운 세계감정과 생활감정을 반영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예술적 자유라는 이념의 새로운 해석을 낳았다.
재정시대의 예술계가 이룩한 가장 중요한 업적은 혁명기간에 생겨난 예술생산자와 예술향수자들 사이의 관계를 안정시킨 데 있었다. 18세기에 형성되었던 시민적 예술감상자층은 이제 그 위치가 더욱 강화되었고 또 이때부터 조형예술 작품에 흥미를 갖는 그룹으로서도 지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세기의 자유주의는 낭만주의를 왕정복고 및 반동과 동일시하였다. 이들간의 연관성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특히 독일의 경우에는 어느 정도 정당성을 지닐지 모르나 전체적으로는 잘못된 역사상을 낳게 하였다. 이러한 잘못된 인식이 처음으로 교정된 것은 사람들이 독일 낭만주의와 서유럽 낭만주의를 구별하여 전자를 반동적 경향을 지닌 것으로, 후자를 진보적 경향을 지닌 것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다.
낭만주의는 획기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획기적이라는 의식도 갖고 있었다. 낭만주의는 서양의 정신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화점의 하나였고, 그 스스로 자기의 역사적 역할을 완전히 의식하고 있었다. 고딕 이래 감수성의 발전이 이때처럼 강한 자극을 받고, 자신의 감정과 본성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예술가의 권리가 이때처럼 전체 문화세계를 지배하는 보편성을 획득하게 된 합리주의는 그의 발전사에서 가장 격렬한 타격을 받게 되었다. 낭만주의의 시대의식, 즉 낭만주의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현재의 의미에 대한 끊임없는 문제제기가 없었더라면 19세기의 모든 역사주의 및 이와 결부되어 일어난 정신사의 깊은 변혁은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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