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비운의 혁명가 박헌영과 남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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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문과학 비운의 혁명가 박헌영과 남로당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 비운의 혁명가
박헌영과 남로당 -
-개 요-
1. 주제선택이유
2. 박헌영과 남로당
3. 김일성과 박헌영 (노선갈등)
4. 관 점
5. 나의 견해
6. 참고도서
1. 주제선택이유
나는 고등학교 때 한국 근현대사를 배웠다. 얼마 되는 않는 짧은 시기에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났고,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시기에 대한 관심이 있었고, 흥미로워했다. 나의 이런 흥미에 불을 당겨준 것은 ‘서울 1945’라는 드라마였다. 이 드라마는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담고 있었다. 남과 북, 좌익과 우익의 갈등과 당시를 살던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주었다. 이것을 보면서 나는 남로당이라는 조직과 북한의 권력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박헌영과 김일성의 관계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 주제를 택하게 되었다. 남한에서는 좌익이라는 이유로, 북에서는 미제간첩이라는 이유로 버림을 받았던 박헌영과 남로당을 조사하고, 그들을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2. 박헌영과 남로당
1)박헌영
1900년에 태어난 박헌영은 1920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고, 그해 11월 상해로 망명, 사회주의 운동에 입문했다. 1922년 4월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은 비밀리에 조선으로 입국하려다가 신의주 경찰에게 체포돼 평양형무소에서 1년 10개월을 복역했다. 1924년 출옥한 뒤 곧바로 서울로 올라온 박헌영은 신흥청년동맹 결성에 참여하고, 조선청년총동맹 중앙검사위원으로 선임됐다. 1925년 11월 국외로 발송한 고려공청의 비밀문건이 일본 경찰에 압수되면서 박헌영과 그의 부인 주세죽은 종로경찰서에 체포됐다. 두번째 투옥된 박헌영은 극심한 고문을 받았다. 박헌영은 재판도중 자살 시도와 단식을 거듭하며 정신병자 흉내를 냈고 몇 차례 병보석 신청 끝에 1927년 11월 감옥문을 벗어났다. 1932년 1월 박헌영은 코민테른의 지시로 조선공산당 재건 준비사업을 위해 상해로 파견됐다. 상해에서 김단야와 함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 기관지『콤무니스트』를 발행했다. 그는 상해에서 비밀리에 국내 공산주의운동을 지도했다. 1945년 서울에 도착한 박헌영은 경성콤그룹 멤버들과 만나 조선 공산당 재건 준비 위원회를 만들고 『해방일보』를 창간하기로 결정했다. 1945년 9월 11일 재건위원회를 기반으로 조선공산당이 재건됐다. 박헌영은 서열 1위의 중앙위원으로 총비서라는 직임을 가졌다. 김일성은 서열 2위의 중앙위원으로 지목됐다. 같은 해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 공동성명이 발표됐다. 12월 25일 평양으로 간 박헌영은 12월 31일 김일성과 함께 민정사령관 로마넨코와 회견했다. 로마넨코는 "미국이 신탁통치를 주장해 하는 수 없이 절충안으로 5년간 후견제를 실시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1946년 1월 2일 새벽 서울로 돌아온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명의로 모스크바 3상회의 지지성명서를 발표했다. 1946년 3월 21일 작성된 미군 정보문서는 지금 만일 총선거가 실시된다면 공산당 지도자 박헌영이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12월 10일 남로당 중앙위원회는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를 채택해 UN 감시하에 실시되는 남한 단독선거에 대해 반대할 것을 천명했다. 1948년 2월 7일 UN 한국위원단에 반대하는 총파업이 발발했고, 3월 12일 김구, 김규식, 홍명희 등이 7인 성명을 발표해 단독선거를 반대했다. 4월 19~24일 평양에서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가 열렸고, 8월 21일 해주에서 남조선 인민대표자대회가 개막됐다. 박헌영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영등포구 선거구)으로 선출됐다. 8월 25일 박헌영은 남북조선노동당 연합중앙위원회를 결성하고 중앙위원 겸 제2비서로 선출됐고, 9월 2일 평양에서 개최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에 참석했다. 9월 9일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에서 박헌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수상 겸 외무상에 선임됐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7월 2일 박헌영은 외무상 명의로 미국군의 한국전쟁 참전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10월초 박헌영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연전연패하는 인민군 내 총정치국을 창설하고 책임자가 됐다. 11월 26일 박헌영은 외무상 명의로 UN 총회 의장과 안전보장이사회 의장에게 성명을 보내 미군의 학살 만행을 UN이 중지시킬 책임이 있음을 촉구했다. 51년 5월 8일 박헌영은 외무상 명의로 UN 총회 의장과 안전보장이사회 의장에게 성명을 보내 미군이 조선에서 세균전 무기를 사용하고 있음을 규탄했다. 1952년 8월 3일 이승엽 등 12명의 남로당 출신 당간부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간첩테러 및 선전선동 행위에 대한 사건」 연루자로 지목돼 체포됐다. 10월 17일 박헌영은 조선정전협정 초안 등 3개 문건을 외무상 명의로 UN에 타전했다. 1953년 3월 하순 박헌영은 체포됐다. 당내 종파를 조직하고 당 기밀을 미국에 누설했으며 한국전쟁 패배의 원인을 만들었다는 이유에서였다. 8월 5~9일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6차 전원회의의 결정에 따라 박헌영은 당에서 제명되고 재판에 회부됐다. 8월 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에 의해 이승엽 등 12명에 대한 공판이 진행됐다. 1955년 12월 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 검찰소 검사총장 이송운은 박헌영을 미제국주의의 고용간첩의 두목, 공화국 전복 기도 혐의로 기소했다. 12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특별재판에서 박헌영은 사형 및 전 재산 몰수형을 선고받았다.
2)남조선노동당
1946년 11월 조선공산당과 남조선신민당(新民黨) 및 조선인민당(人民黨)이 합동하여 창당되었다. 1925년 조선공산당을 결성한 공산주의자들은 광복이 되자 1945년 8월 20일에 박헌영(朴憲永)을 옹립하는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가 발족하였고, 북한에는 같은 해 10월 북조선분국을 두었다. 남조선노동당은 합법적으로 남한의 공산화공작을 계속하였고, 1946년 2월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결성하여 민족분열을 꾀하였다. 1946년 8월 29일 북한에 북조선노동당이 결성되었으며, 1950년 4월 남북의 노동당이 조선노동당으로 통합됨으로써, 남조선노동당은 김일성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북한으로 간 남조선노동당 계열은 그 지도자 박헌영과 함께 1955년 말까지 온갖 명목으로 숙청 또는 처형되었다.
3. 김일성과 박헌영
박헌영은 일제시대 때 꾸준히 국내에서 운동을 벌였고, 김일성에 비해 지지기반도 컸다. 하지만 결국 김일성에 의해 숙청을 당하고 만다. 김일성보다 우위에 있던 사회주의 지도자가 무슨 이유에서 숙청당하였는지 아래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