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통일의 실패와 전쟁의 중간총괄 : 북조선은 개전 3일째 서울을 장악하였으나 8월경 인민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한 상태에서 9. 15.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보급선이 차단되어 전황이 역전되었다. 10. 25. 중국의 참전으로 전황이 다시 역전되어 12.6. 평양을 탈환하였고, 김일성은 1950. 12. 21. 당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에서 전쟁상황을 총괄 보고하는데, 김일성은 박헌영과 전쟁 책임문제를 두고 피차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 타협하였고, 후퇴시기에 리현상을 중심으로한 남부군(빨치산 투쟁)이 제2전선을 형성함에 따라 최고책임자인 박헌영이 위상이 높아졌고, 김일성은 최고지도부의 책임을 언급하는 대신 각 정파의 간부 및 전선지휘관에게 균등하게 책임을 지우는 방식을 선택하였다.
허가이의 실각 : 1951년 6월 중순 전선이 교착상태에 들어가면서 통치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통치전반을 총정리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당원재등록사업과정에서 허가이는 유엔군 점령기간동안 많은 당원이 신분을 숨기기위해 당원증을 없애 새로 당원증을 교부하면서 하부 당원들에게 대규모 징벌을 가하게 된다. 김일성은 허가이를‘관문주의자’,‘징벌주의자’라 비판하며 노동자계급 성분 비율을 중시하는 관문주의를 없애고 계급성분보다는 폭넓은 대중적 기반을 중시하는 대중정당을 만들고자 하였다. 이에 허가이는 당부위원장과 제1비서 및 조직부장에서 부수상으로 좌천되었고 당내실권자로서 그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이는 스탈린의 양해가 없이 가능하지 않았으며 소련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결속하여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양해한 것으로 보인다)
2. 625 전쟁과 당군관계
1) 당내 군사적 비중 증대와 여러 군사적 구성요소 : 전쟁을 전후하여 상당수의 간부가 군에 동원되어 군의 정치간부직에 취임하였고 결과적으로 당을 군에 더욱 접근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북조선에서는 6.25 전쟁을 통해 소련계의 정규군형의 군대, 연안계의 인민전쟁형의 군대, 남로계의 유격전형의 군대를 결합하려고 했는데, 전쟁 초기에는 정규전의 우세에 의한 일방적인 승리였으나, 후퇴 과정에서 한계가 드러났고, 유격전의 지휘는 남로파가 담당(만주파의 빨치산 투쟁 경험은 남한에서 살리지 못함)하며 정규군 가세하였다.
2)전쟁 발발 전후 군내 정치조직의 변화 : 전쟁 전까지 군내 정치사업은 문화부를 통해 이루어졌고, 중대장은 중대의 총지휘자이고 문화부 중대장은 정신적 지도자라고 규정하였고, 인민군에는 당단체가 없었지만 내무성 관할하의 경비대(준군사조직)에는 당세포와 당단체가 설치되어 있었다. 6.25 전쟁 발발 후 군내 당조직의 역할이 강조되었고, 전쟁개시와 동시제 군사위원회가 설치된 이후 군사위원을 파견하였으나 군사위원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은 전선사령부와 군단사령부 수준까지였다.
3) 인민군 내 정치기관 및 당 단체의 설치 :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쟁상황은 역전되었으나 북조선과 중국간에는 군사지휘권을 두고 갈등이 조성되어 중국인민지원군사령원겸 정치위원 펑떠화이는 김일성, 슈티코프가 3인 지도부를 구성하여 군사문제에 관하여 협의하고 작전지휘의 통일성을 확보하자고 요구하였고, 11. 17. 스탈린이 중국의 작전지휘권을 전적으로 지지하자 김일성은 마지못해 연합명령은 펑떠화이(사령원), 김웅(부사령), 박일우(주사령) 3인의 서명으로 집행토록 하였다. 조중연합사령부 설치 및 작전권의 이관은 당내에서 지금까지 인민군의 정치사업에 관해 전면적인 재검토를 요구하게 되었고, 인민군대내에 당의 영도적 역할을 높이기 위해 문화훈련국을 총정치국으로 문화부는 정치부로 개편되어 중대에는 당세포, 대대에는 대대 당위원회, 연대에는 연대당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군사지휘관을 당조직보다 상위에 위치시킴으로써 군사단일제를 견지하였다. 이 시기에 김일성의 입지는 매우 위태로웠고, 전세역전으로 인한 위기상황을 김일성은 박현영과의 협조를 통해 수습해갔다.
4) 김일성의 반격과 박일우의 탈락 : 인민군내 당단체가 조직되고 부대가 재편성되면서 허가이가 비판되고 당원확대정책이 전개되면서 인민군이 원칙상 당의 군대라는 사고방식도 점차 정착되어 갔다. 군사단일제의 원칙과 당지도는 계속 마찰을 일으킬 수밖에 없어, 김일성은 군내 정치사업을 개선하는 대책으로 군사위원의 역할을 높일 것과 8~9월에 중대 당세포에서 연대 당위원회에 이르기까지 당조직 지도기관의 총괄 및 선거를 실시할 것을 제안하게 된다. 군사위원회를 강화하여 정치적 통제의 중심에 둠으로써 군에 대한 치적 통제권을 되찾고자 하였고, 중국의 승인하에 박일우가 권력의 중추로서 밀려나게 됨으로써, 김일성이 군에 대한 통제권을 대내적으로 완전히 되찾게 되었다.
3. 전쟁의 정치군사적 귀결
1) 군사이데올로기의 추이 : 인민군은 만주파가 창건하여 처음부터 지휘계통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어 빨치산 전통의 군대였고, 김일성 항일 빨치산 투쟁의 강조는 전쟁초기와 달리 전쟁이 후퇴를 거듭하면서 눈에 띄게 줄었다가 1953. 2. 8. 인민군 창건 5주년을 기념하여 김일성에게 원수의 칭호가 수여되면서 군에 연안계의 존재를 암시하는 표현은 사라지고, 무장투쟁의 전통은 김일성 항일유격투쟁의 전통으로 단일화되었다. 당이 제일 전면에 내세워지고 항일빨치산 전통은 뒤에 놓이며 동시에 소비에트 군대와 동렬에 세워지게 된다.
2) 김일성의 권력기반 강화: 남조선 해방이라는 측면에서 6.25 전쟁은 참담한 실패였고 김일성이 위치는 일시적으로 동요하였지만, 그는 변화를 잘 극복해내고 오히려 권력기반을 굳히게 되었다. 전쟁의 책임자는 김일성 자신이었으나 그는 오히려 책임을 각 정파의 유력자에게 전가하여 전쟁기간 급속히 성장한 당과 군은 김일성의 확고한 기반이 되어준다. 특히 허가이의 좌천과 박일우의 해임은 김일성의 최대 라이벌인 박헌영이 숙청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3) 625 전쟁의 책임문제와 박헌영 및 남로당파 숙청 : 인민군의 제2차 남진시기에 유격부대를 정규군으로 통합하는 작업이 시도되었고, 책임자는 남로파의 배철이었으며, 1천여 명의 인원을 훈련하는 간부훈련소인 금강정치학원도 만들어졌는데, 이들은 박헌영에 대한 충성심으로 독자의 군사적 기반을 갖추고 있어 김일성에게 우려의 존재가 되었다. 한편, 정전의 성립이 명확해지면서 포로송환문제가 최대의 쟁점이었는데 남로파는 정전교섭과 관련하여 강경한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소련과 중국의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요소였다. 김일성이 전쟁에 대해 책임을 지기에는 내외적으로 파급될 범위가 너무 넓어 박헌영에게 책임을 지우기로 결정된 것이다. 1952. 12. 15~18. 제5차 전원회의에서 남로파에 대한 숙청이 예고되었고, 박헌영을 제외한 리승엽 등 12명은 전복 및 반국가적 무장폭동 선전선동 협의로 최고재판소에 기소되어 8. 3. 재판 개시되어 초고속으로 심리된 후 8. 6. 판결이 언도되었다. 박헌영에 대한 기소가 늦어진 것은 그가 죄를 인정하기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남로당계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그의 재판으로 인하여 일어날 내외의 파문을 피한 것이었고, 그의 재판은 2년 4개월 뒤인 1955년 12월 2일에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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