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당금석과안록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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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예당금석과안록 소고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예당금석과안록』소고
目 次
머리말
Ⅰ. 예당금석과안록의 저술 및 출현배경
1. 추사의 금석학에 대한 인식
1)인식에 대한 근본적 동기
2)학문적 성향
2. 북한산비에 이르게 된 과정
3. 추사 이전 조선의 금석학 연구
Ⅱ. 예당금석과안록의 내용분석
1. 체재분석
1)체재
2)소문단별 분석
2. 내용분석
Ⅲ. 예당금석과안록의 가치
1. 금석학적 가치
2. 역사적 가치
Ⅳ. 예당금석과안록 이후의 금석학
맺음말
머리말
흔히 완당 청의 고증학자 완원이 추사 김정희에게 완당이라는 호를 내려 사제의 인증을 확실히 하였는데 30대로 들어서면서 김정희는 추사보다도 완당으로 불리게 된다. 본고에서는 그의 호를 완당과 추사두개를 혼용하여 쓰기로 한다.
김정희와 연관해서는 그의 기괴한 글씨인 추사체를 먼저 떠올리게 될 것이다. 물론 추사는 부단한 노력과 法古創新의 자세로 그만의 독특한 서예체라고 할 수 있는 추사체를 탄생시킨 당대 최고의 서예가였다. 하지만 그가 서예를 학문적으로 다룬 제1인자였으며, 학문에 있어서는 실학 특히 고증학과 금석학에서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다는 점 그리고 옛 서화작품에 대한 훌륭한 감식안을 가졌던 사실 등은 그의 서예가로서의 측면 때문에 감춰져 보인다. 즉 추사는 단순히 한 측면에서 평가될 인물이 아닌 것이다. 그의 연구가 많이 이루어 졌을 것 같지만 추사의 傳記에 대해 통시적으로 접근 한 이는 지금껏 최완수와 유홍준 밖에 없다. 물론 추사의 서예, 문학, 고증학 등 따로 접근한 이는 많다. 추사의 학식과 인품이 너무나 크고 넓기 때문에 “세상에는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 라고 한 世評이 적절하게 맞아 떨어진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추사의 금석학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나타내준『예당금석과안록』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예당금석과안록』은 추사가 황초령비와 북한산 순수비를 고증한 한국 금석학 최초이자 최고의 논문이다. 우선 본고에서는 『예당금석과안록』논문 자체에 분석과 왜 이러한 논문이 나오게 되었는가에 대해 추사와 시대적 배경을 알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추사 이후의 금석학의 발전을 살펴봄으로써 조선에서의 금석학 발전에 대해 개괄적으로 이해해 보고자 하는 목표를 가지고 글을 전개하고자 한다.
Ⅰ. 예당금석과안록 『禮堂金石過眼錄은』 추사 김정희가 황초령비와 북한산비를 고증하는 내용을 담은 일종의 금석학 논문이라고 할 수 있다. 원문과 번역은 민족문화추진회 사이트(www.minchu.or.kr)의 고전국역총서 완당전집 제1권 攷 眞興二碑攷라는 제목하에 실려있으니 참고바란다.
의 저술 및 출현배경
1. 김정희의 금석학에 대한 인식
1) 인식에 대한 근본적 동기
추사의 금석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의 가장 근본적인 동기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한 답은 그의 학문적 성향 이전에 금석학에 대한 접근 기회를 어떻게 부여받았는지를 살펴봄으로 인해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추사는 양자로 들어간 백부 김노영의 영향으로 인해 청나라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김노영은 북학의 선구자인 담헌 홍대용의 再堂姪로 연암 박지원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또한 김노영은 연암의 실학사상을 이어받아 북학론을 완성한 초정 박제가와 교류하였다. 김태욱, 1999「추사의 실사구시설의 교육철학적 논의」, 『교육철학』, 한국교육철학회, 60쪽
이로 인해 추사의 스승은 박제가가 되었으며 박제가는 추사에게 자신이 추구하는 학문인 북학을 지도하였으며 청나라 연경의 발달된 문물과 학자들의 활동에 대해 전해주게 되며 이는 추사가 1809년 24세의 나이로 연경에 가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