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최후의 게릴라 체 게바라
-20세기 최후의 게릴라, 체 게바라-
‘20세기 최후의 게릴라, 체 게바라’라는 책을 처음 펼쳐봤을 때, 많은 사진자료가 내 시선을 끌었다. 무언가 재미있는 것 같아서 기대감을 안고 책을 읽어보았다. 이 책의 내용에 앞서 체 게바라에 대해 간단하게 말해보려고 한다. 체 게바라의 본명은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로 아르헨티나 출생의 쿠바의 정치가이자 혁명가이면서, 멕시코에 머무르면서 쿠바혁명에 참가하였다.
이 책은 마치 위인전과 같이 체 게베라의 사진들과 기록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그의 생애를 책 한권에 담았다고 할 수 있다. 체 게바라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느 가정처럼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하지만 2세가 되던 해, 찬물로 목욕을 시킨 것이 잘못되어 폐렴으로 번졌고, 그로 인해 그는 천식이라는 병이 그를 괴롭혔다.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많은 시간을 집에서 보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많은 책을 접하여 독서광이 되었다. 또 그는 연약한 몸을 이기기 위해 수영, 축구, 테니스, 골프 그리고 천식 발작이 일어날지 모를 것을 대비해 호흡기를 들고 럭비 경기에 참여 할 정도로 운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가 20살 쯤 되던 1947년에 그는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1953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과대학을 졸업하였다. 23세가 되던 해에는 라틴 아메리카로 여행을 떠나기로 계획을 한다. 1951년 친구와 떠난 이 여행에서 억압받는 인디오와 노동자, 농민의 실상을 직접 보게 되었다. 1952년 3월에 추키카마에 있는 브레이든 컴퍼니의 구리광산을 찾아가던 중 한번은 폭우로 플랫폼이 물에 잠기자 백인들만 객차에 몸을 피하라고 하는 장면을 보았다. 너무도 팽배하게 퍼져있는 백인우월주의는 그에게 충분히 충격적으로 다가왔고, 결국 그의 미래를 정치로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아마존에서는 나병환자들과 지낸 적도 있었다. 이 여행을 통해 그는 같은 시대에 다른 곳의 사람들이 고통 속에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교수님의 자리를 이어받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착취의 정치적 조건을 학습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 행동, 다시 말해 게릴라가 있어야한다고 생각했다. 불리비아와 페루를 몇 개원 동안 여행을 하다가 친구와 헤어지고, 체 게바라는 내처에콰도르로 향했다. 이번에는 에두아르도 가르시아와 함께하여 코스타리카에 도착했다. 그 곳에서 바티스타 정권에 대항하는 쿠바 망명객들을 만날 수 있었다. 바티스타 정권은 친미계열의 정권으로 당시 쿠바를 독재하고 있던 정권이다. 베아트리스 아주머니에게 쓴 편지의 내용을 보면 ‘... 그리고 이들 자본가들의 착취에 종지부를 찍을 때까지 결코 물러서지 않으리라 다짐했습니다. 진정한 혁명가로 태어나기 위해 이제는 과테말라로 가볼까 합니다.’라는 구절에서 행동에 대한 그의 의지와 결심을 느낄 수 있다.
그 해에 그는 ‘힐다 가데라’라는 여인을 만났다. 미래의 부인이 될 여인이다. 체 게바라는 그 여인을 처음 봤을 때부터 그녀의 열정과 명석함에 빠져버렸다. 힐다와 체 게바라는 사회주의의 앞날에 관해서 얘기를 하곤 하였다.
한편, 혁명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던 과테말라의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과테말라가 자유롭게 된다면 거대 농업회사들, 특히 유나이티드 프루트사의 지배가 막강했는데, 과테말라에서 솔솔 불어오던 자유의 바람은 미 행정부를 불안하게 하였다. 그리고 미국의 침공이 있을 거라는 괴문도 돌아다녔다. 이 때 체 게바라는 농민을 무장시키는 것을 제안하였고, 1954년 6월 18일, 26세가 되던 해, 미국의 폭격이 일어났다. 체 게바라는 최후의 결단을 하였다. 그의 결단은 역시 베아트리스 아주머니에게 쓴 편지 중에 ‘... 이제 멕시코로 가겠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 이 있든지 다음번 무장봉기에는 기필코 참여하고 말겠습니다.’라는 구절에서 엿볼 수 있다. 힐다에게 멕시코로의 추방령이 떨어지고, 그리하여 그는 멕시코로 가게 되었다. 그 곳에서 그는 그가 글쓰기를 끝낼 때 아르헨티나의 감탄사인 ‘체’를 수식으로 붙이곤 하였는데 그 때문에 그는 ‘체 게바라’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멕시코에서도 그와 힐다는 쿠바 망명객들과 어울렸다. 그리고 그는 쿠바를 꿈꾸었다.
1955년 7월 초, 체가 저항군의 일원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혁명가로서는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의사로서 일원이 되었다. 1956년 2월부터 게릴라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그 해 11월 25일 82명의 전사가 그랜마호에 올랐다. 이들은 ‘해방군’이 되거나 혹은 ‘순교자’가 될 운명이었다. 배에 오르면서 체 게바라는 모든 것을 반드시 이루겠노라고 마음을 먹었다. 반면 적이라 할 수 있는 바티스타의 병사들도 전투태세에 돌입하였다. 쿠바 땅에 도착하자마자 질퍽한 늪이 그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무거운 탄약과 장비를 들고 그들을 정글을 헤쳐 나갔다. 하지만 그랜마호 저항군들의 잔해를 발견한 낚시꾼의 신고로 바티스타는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결국 세 명의 동료가 전사하고, 스물한 명의 저항군들을 체포되어 처형되고, 체는 목과 옆구리의 총상을 입었다. 참담한 결과였다. 소그룹이 된 그들은 시에라마에스트라는 산악지대에 머물게 되었다. 이곳에 고립되어 살던 농민들은 저항군의 동맹자가 되었다. 저항군은 두 번째 공격을 감행했다.
저항군의 일원인 피델의 정치 목적이 뚜렷해질수록, 혁명에 대한 체 게바라의 열정을 더욱 커졌다. 그의 관심은 우선 충성심이 강한 간부들과 병사들을 길러내는 것이었다. 저항군의 부대에 점점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였다. 심지여 여자들까지도 참여하였다. 체 게바라는 여성들의 안전을 우선시하였고, 부부생활도 인정하였다. 또한 여성을 희롱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규율로 지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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