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활동 (1934~1990)
1934년 전라남도 광주시 동명동에서 승주군수를 지낸 박병모의 3남 2녀 중 막내이자, 유복자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4학년 작문시간에 쓴「무궁화」라는 동요가 일본 아사히신문 주최 학생 동요대회에 1등으로 당선된 일이 있으며 교지 등에 글을 발표하면서 ‘서정성’에 눈을 떠갔다. 1950년 중학교 2학년 때 625전쟁이 일어나자 모친과 무등산으로 피난하여 어둡고 고통스러운 시절을 보내게 된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에 의한 동족간의 전쟁과 참상은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 시인으로 하여금 깊은 좌절감을 느끼게 했을 것이며, 이때의 상실감과 분노가 ‘분단의식’이라는 그의 일관된 시정신의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1952년 광주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학생잡지에 그의 시가 실리고『상록집』이라는 4인 시집을 펴낼 정도로 남다른 문학적 감수성을 가졌으며 고교시절부터 술을 벗 삼으면서도 성적은 우등이었고 문예부장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1953년 「석상의 노래」가 이한직의 추천으로 『주간 문학예술』지에 추천되면서 일찍부터 주목받는 문학청년 시절을 보냈다. 이 시기에 이미 김현승, 서정주 등의 기성 시인들과도 교분을 가졌는데 특히 김현승과의 관계는 어느 사람보다 두터웠다.
전남대학교 문리대 정치학과에 입학한 그는 1955년에 박성룡, 김정옥 등과 동인을 결성하고 시동인지『영도』 1955년 전라남도 출신 대학생들로 구성된 동인들이 창간한 시 동인지. 김정옥·박성룡·박봉우·정현웅·주명영·강태열 등이 창간 동인이었고, 그 후 이일·장백일이 참가하고, 만 10년이 되었을 때 민재식·윤삼하·이성부·김현·최하림 등이 참가하였다. 다른 동인지의 회원들과는 달리 모두 중앙 문단에 진출,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는 점이 특색이다. 1966년 4월 4집을 내고 종간하였다.
를 발간하였으며, 여기에「산국화」,「강물」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또한 박봉우는 동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1956년에 시「휴전선」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문단에 등장했다. 「나비와 철조망」,「목숨의 시」,「사미인곡」등의 현실의식을 담은 작품들을 줄곧 발표하면서 문단에서 주목받는 시인으로 자리를 확보하여 갔다. 이 무렵 박봉우는 동서고금의 문학서들을 독파했는데, 특히 괴테와 톨스토이, 이태준, 정지용, 한설야, 박태원, 이기영 등의 문학작품에 심취했다고 한다. 1957년에 신춘문예 당선 시제로 첫 시집 『휴전선』이 출간되었고, 1959년에 두 번째 시집 『겨울에도 피는 꽃나무』를 출간하였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419혁명을 소재로 한 최초의 시 「젊은 화산」을 4월 25일에 발표했다. 1962년에 세 번째 시집 『4월의 화요일』을 간행했으며,『현대문학』신인상을 수상했다.
1970년대 서울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낙향하기로 결심한다. 서울을 떠나려 하는 그의 심경과 결심이 네 번째 시집『황지의 풀잎』에 실려 있다. 1985년에 현산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87년에 출간된 그의 마지막 시집 『딸의 손을 잡고』에는 가족과 이웃에 대한 살뜰한 연민이 엿보인다. 아내를 잃은 그는 아내의 생애를 괴로운 나날의 삶이라며 우리 민족의 역사처럼 망가진 채 죽은 아내의 생애와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자 신과 한 잔의 술도 나누지 못하고 자신의 곁을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며 겨울이면 죽은 아내가 그리워 울곤 했다. 세 아이를 남겨둔 채 정신병동에 누워 있다가 1990년 3월 1일 56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시인 박봉우는 조국의 현실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가장으로서는 무능하고 힘없는 아버지였지만 조국의 분단과 왜곡된 당대 현실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저항해 나간 시인이었다.
2. 시적 경향과 변모양상
박봉우는 등단 이후 줄곧 민족 분단의 아픔과 통일에 대한 염원을 노래했던 시인이며 그의 문학은 질곡의 한국사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자신이 살아가는 현실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했기에 사회의 제 모순들을 발견하고 이를 비판하는데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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