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중학교 2학년 때 동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이 일어나자 모친과 무등산으로 피난하여 어둡고 고통스러운 시절을 보내게 된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에 의한 동족간의 전쟁과 참상은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 시인으로 하여금 깊은 좌절감을 느끼게 했을 것이며, 이때의 상실감과 분노가 ‘분단의식’이라는 그의 일관된 시정신의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1952년 광주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학생잡지 『수험생』에 「황소의 노래」라는 시로 1석을 차지하기도 했으며, 2학년 때는 『상록집』이라는 4인 시집을 펴낼 정도로 남다른 문학적 감수성으로 문학에 대한 관심을 늦추지 않았다. 또한 고교 시절부터 술을 벗삼으면서도 성적은 우등이었으며, 문예부장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1953년 「석상의 노래」가 이한직의 추천으로 『주간 문학예술』지에 추천되면서 일찍부터 주목받는 문학청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문학에 대한 열정과 특유의 활달한 성품으로 김현승, 서정주 등의 기성 시인들과도 교분을 가졌다.
전남대학교 문리대 정치학과에 입학한 박봉우는 1955년에 박성룡, 김정옥 등과 동인을 결성하고 시동인지『영도』를 발간하였으며, 여기에 「산국화」, 「강물」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또한 박봉우는 동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56년에 시 「휴전선」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문단의 전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박봉우는 「나비와 철조망」, 「목숨의 시」, 「사미인곡」 등의 현실의식을 담은 작품들을 줄곧 발표하면서 문단에서 주목받는 시인으로 자리를 확보하여 갔다. 이 무렵 박봉우는 동서고금의 문학서들을 독파했는데, 특히 괴테와 톨스토이, 이태준, 정지용, 한설야, 박태원, 이기영 등의 문학작품에 심취했다고 한다.
1957년에 신춘문예 당선 시제로 첫 시집 『휴전선』이 출간되었고, 1958년 전남 문화상을 수상했다. 1959년에 두 번째 시집 『겨울에도 피는 꽃나무』를 출간하였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419혁명을 소재로 한 최초의 시 「젊은 화산」을 4월 25일에 발표했다. 1962년에 세 번째 시집 『4월의 화요일』을 간행했으며, 『현대문학』신인상을 수상했다.
1970년대 서울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낙향하기로 결심한다. 서울을 떠나려 하는 그의 심경과 결심이 네 번째 시집 『황지의 풀잎』에 실려 있다. 1985년에 현산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87년에 출간된 그의 마지막 시집 『딸의 손을 잡고』에는 가족과 이웃에 대한 살뜰한 연민이 엿보인다. 아내를 잃은 그는 세 아이를 남겨둔 채 정신병동에 누워 있다가 1990년 3월 1일 56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Ⅱ. 시적 경향과 변모 양상
1. 1950년대의 시적 경향
① 『휴전선』 - 분단의식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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