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벨라르두스 아벨라르두스 생애 아벨라르두스 저서 아벨라르두스 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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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아벨라르두스
[생애]
아벨라르두스는 1079년에 프랑스 브레타뉴 지방 빨레(Palet)에서 기사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 베렌가리우스는 그가 기사로서 명성을 떨치기를 원했지만, 아벨라르두스는 오히려 철학, 특히 논리학을 공부하는 길을 택했다. 그가 15세 가량 되었을 때 유명론자였던 로스켈리누스 밑에서 논리학 공부를 시작한 후 유명한 논리학 교사를 찾아 순회하며 탐구에 몰두했다. 마침내 그는 파리에 도착해서 당시 노트르담 대성당 학교의 교장이었던 샹포의 윌리엄 밑에서 공부했다. 윌리엄은 그 학교를 베크의 베네딕도회 수도원이나 라옹과 샤르트르의 대성당학교보다 학문적으로 뛰어나게 만들었지만, 극단적인 관념실재론을 주장하고 있었다. 학생으로 등록되어 있는 동안 아벨라르두스는 윌리엄을 공적인 토론에서 패배시켰다.
이 승리를 이용하여 아벨라르두스는 우선 믈랑 근처에, 나중에 코르베이유에 자신의 학교를 세웠다. 이로써 아벨라르두스는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큰 명성과 많은 추종자를 얻었다. 하지만 공적으로 모멸감을 느낄 정도로 유명한 스승들을 공격함으로써 많은 적도 만들어 내었다. 1108년에 파리로 돌아와서 전에 그가 무찔렀던 샹포의 윌리엄 밑에서 수사학을 공부했다. 학교 생활에서 이미 중요한 요소가 되었던 공적인 토론을 통해서 아벨라르두스는 결국 스승 윌리엄이 지니고 있던 극단적인 실재론의 입장을 변경하도록 만들었다.
34세가 되었을 때, 아벨라르두스는 라옹(!)의 안셀무스에게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는 곧 안셀무스의 교육 방식의 부족함을 발견하고, 짧은 시간 안에 스승을 능가하는 강의를 해 학생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단 하루를 준비해서 에제키엘서를 강의하면서도 스승보다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안셀무스가 개인적인 감정에 호소하는 교부들의 전통을 따른 반면, 아벨라르두스는 논리학 연구에서 얻은 체계적인 질문방식을 사용함으로써 더 뛰어난 강의를 했고 학생들은 이런 방식을 선호했다.
아벨라르두스는 결국 다시 파리로 돌아와, 우선 파리교외의 성 제네베파산 학교에서, 1113년에는 노트르담 주교좌성당학교에서 신학과 논리학을 가르쳤다. 금새 많은 학생이 몰려들어서 그에게 부와 명성을 안겨주었다. 이 때에 그는 노트르담의 참사위원 풀베르투스의 청에 따라 그의 조카딸 엘로이즈를 가르치는 개인교사 역할도 맡았다. 그는 엘로이즈와 사랑에 빠져 그녀를 임신시켰고, 결국 그녀를 몰래 자기 고향 브레타뉴로 데려갔다. 그들은 아스트랄라부스라는 아들을 낳고, 비밀리에 결혼했다. 그의 결혼이 공적으로 알려지자, 아벨라르두스는 엘로이즈를 그녀가 자랐던 성아르켄틸의 수도원으로 보냄으로써 풀베르투스의 분노를 피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배신에 진노한 풀베르투스는 사람들을 고용하여 밤에 그의 방에 침입해서 그를 거세해 버렸다.
아벨라르두스의 개인적인 명성은 그의 철학이나 신학 작품에 보다도 현재까지 남아 있는 편지에 자세하고 솔직하게 기록되어 있는 엘로이즈와의 연애 사건에 더 집중되었다. 그는 역사가들이 12세기의 사회적이고 지성적인 생활에 대한 탐구에 도움이될 상세한 내용을 담은 자서전과 개인적인 편지들을 남겨 놓은 유일한 철학자이다. 이런 자료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Jules Michelet과 같은 19세기 역사학자들이 중세 시대의 지성적 자유에 관해 만들어낸 잘못된 전형을 파괴하는 데 매우 큰 기여를 했다.
그후 아벨라르두스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생드니에 있는 베네딕도회 수도원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성격대로 동료 수도사들의 삶의 방식을 줄기차게 비판하고, 수도원의 수호성인이 아레오파기타의 디오니시우스와 동일한 인물이 아니라는 증명을 제시함으로써 반대자들의 수를 더 늘렸을 뿐이다. 그는 1121년, 스와송의 공의회가 그의 삼위일체에 대한 가르침을 단죄할 때까지 파리에서 다시 가르쳤다. 일정 시간을 수도원에 유폐된 다음에 은자의 생활을 하고자 했지만, 계속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요청 때문에 결국 파리 근교의 작은 마을에서 다시 학교를 세웠다. 1125년에는 자기 고향인 브레타뉴 성질다 수도원의 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거기서도 그는 수도사들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몇 차례에 걸쳐 생명의 위협을 받은 후, 1136년에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한편 엘로이즈는 새로운 수녀원의 총원장이 되어 있었는데, 아벨라르두스는 그녀를 위해 수도원의 생활 방식에 관한 규칙을 마련해 주는 한편 종교적인 서신도 주고받았다.
파리로 돌아온 아벨라르두스는 성 제네베파산 학교에서 불타는 정열로 가르치며 많은 글을 써서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교사들을 비판하고 신학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수정함으로써 많은 신학자의 적대감을 샀다. 결국 생티에리의 윌리엄은 그의 가르침을 이단이라고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두스에게 고발했다. 윌리엄은 아벨라르두스가 삼위일체와 같은 모든 신비조차도 무의미한 것으로 밝히려고 지성주의적으로 접근한다고 고발한 것이다. 당시 가톨릭교회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베르나르두스는 교황 인노첸토 2세와 많은 주교에게 아벨라르두스와 그의 가르침에 반대해서 편지를 썼다. 베르나르두스와 공적으로 논쟁을 벌일 기회를 가질 수 있으리라는 착각으로 아벨라르두스는 1141년에 상스(Sens)공의회에 등장했다. 그러나 그의 맡을 수 있던 역할은 단죄하는 판결문이 읽혀지는 동안 조용히 듣고만 있는 것이었다. 이에 항의하기 위해 로마로 가던 길에 그는 공경하는 페트루스에 의해서 클루니 수도원에 받아들여졌다. 페트루스는 그에게 투쟁을 포기하도록 설득했고, 베르나르두스와의 화해를 중재했으며, 그의 여생을 클루니 수도원의 보호 아래서 보내도록 교황의 허가를 얻어냈다. 아벨라르두스는 클루니 수도원의 분원(샬롱-쉬-사옹)에서 1142년경에 사망했다.
[저서]
아벨라르두스의 현존하는 매우 중요한 저작들은 논리학과 신학을 다룬 것들이다. 그 외에도, 설교문, 시, 편지 등이 남아 있고, 1129년경까지 그의 생애에 대해 진술하는 자서전(Historia calamitatum)도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