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통한 덕목 가르치기 - 절제
- 절 제(節制)
1. 덕목 설정 이유 - 절제(節制)
절제의 덕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대 사회는 지나치게 물질적 성장만을 추구해 온 나머지 상대적으로 인간 존중의 가치는 점점 떨어지게 되었다. 자본주의의 발달로 인해 사람들은 경제적 부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부의 축적을 곧 행복의 척도로 여기기에 이르렀다. 곧 물질적 가치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절제’라는 덕목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된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양보와 자제를 하기보다 자신의 물질적인 욕구만을 충족하려고 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지금 누군가 우리에게‘절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답할 수 있을까? 억제하는 것, 줄이는 것, 절약하는 것 등과 같은 대답을 할 뿐 정확히 무엇이라고 말을 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사실 우리는 절제라는 덕목이 중요하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실제로 절제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 절제에 대해서 언급한 고전들과 칼럼, 서적들이 많은 가운데서도 우리는 정작 절제의 개념에 대해서 정의를 내릴 수 없어 의견이 분분하였다. 절제를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풀이하면‘적절하게 마르다’, ‘알맞게 자르다’등의 뜻으로 풀이된다. 그럼 과연‘무엇’을 적절하게 마르거나 알맞게 자르고 억제한다는 것인가? 그 무엇이라는 것을 우리는 욕망, 욕심, 쾌락이라고 생각하고 절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의견을 교환하였다.
모든 사람은 무엇인가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욕망을 가지게 된다. 욕망 그 자체는 무색무취한 것이다. 문제는 욕망의 내용에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정신적 쾌락에 대한 욕망, 즉 나를 살찌우는 마음가짐은 어떤 경우에든 아름다운 욕망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나를 살찌운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이는 진리를 탐구하거나 예술을 감상하는 것 등과 같은 정신적 쾌락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내게 이런 것들이 부족함을 깨닫고 그런 것을 가지겠다고 욕심내고, 그러한 욕망을 가진 사람을 방탕한 사람, 무절제한 사람이라고 하진 않는다. 이것이 바로 자신을 살찌우는 욕망이고, 남과 더불어 행복해지는 욕망이다.
결국‘절제’라는 단어는 정신적 쾌락보다는 보다 즐겁고, 보다 편안하고, 쾌감을 추구하는 육체적, 즉 감각적 쾌락과 관계한다는 것이 우리들의 공통적인 의견이었다. 그러므로 욕망의 절제, 성욕의 절제, 금전에 대한 욕구로부터의 절제 등 절제와 수많은 감각적인 쾌락이라는 단어가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절제를 ‘무감각’ 과 ‘방종’의 중용으로 본다면, 이러한 쾌락에서 무감각의 악(惡)은 아마 드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쾌락을 추구하는 정도가 너무 과한 것이 문제이다. 그러므로 육체적감각적 쾌락의 방종 상태에 있는 경우에 절제가 필요하다고 잠정적인 합의를 보았다. 이를 통해 절제란 모든 것을 분에 넘치지 않도록 알맞게 조절한다는 것이며, 방종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이성으로 제어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욕망 제어를 위한 노력이 인류가 탄생한 이래로 성인들과 윤리학자, 철학자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화두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절제’라는 덕목을 동양과 서양에서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맹자는 “사람이란 자기의 성정(性情)에 따르기만 한다면 선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인의예지는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것인데, 우리가 이를 생각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라고 하면서, “사람들은 자기의 닭이나 개를 내놓게 되면 찾을 줄 알면서도 자기의 마음을 내놓고서도 찾을 줄을 모른다.”고 한탄하였다. 맹자가 교육의 목적을 바로 자기의 내놓은 마음을 찾는 것, 곧 ‘구방심(求放心)’에 둔 것도 이를 지적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절제’란 바로 그 성정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마음, 혹은 그 성정을 붙들고 놓지 않으려는 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절제란 인간이라면 늘 마음속에 간직하고 힘써야 할 성질의 덕이다. 특히 절제의 덕은 서양에서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을 중심으로 하는 고대 그리스 철학 이래로 중요한 기초적인 덕들 중의 하나로 여겨져 왔다.
절제의 의미가 금욕주의자들에 의해 상당히 왜곡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절제라는 것은 즐기지 않는다면 존재할 수가 없는 덕이 아닌가. 절제란 덕을 즐기지 않는 것도 아니고, 최소로 즐기는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절제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안분지족(安分知足)인 것이다. 결코 적은 것을 가지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많이 가지지 못했을 때 적은 것을 가지고도 적은 것에 만족할 줄 아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만족에 대한 절대적이거나 객관적인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상황과 특성이 천차만별일 뿐만 아니라 절제에 대한 기준은 개인에 따라서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안분지족(安分知足)에 대한 판단 기준은 결국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에 대한 판단 기준이 비록 주관적이라 할지라도 문제될 것은 전혀 없다. 절제를 익히고 절제를 행한다면 명확한 기준의 부재에 관한 문제는 사소한 것에 불과한 것이라 생각한다.
정말 절제는 미덕일까?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처럼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너무 지나치게 하면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며, 지나친 욕심은 인간의 마음을 병들게 할 수도 있다. 이를 우리의 염두에 둔다면 절제는 우리가 일평생 마음에 품고 실천해 나가야 할 미덕인 것이다.
2. 이야기
황금알을 낳는 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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