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1.작가소개
又川 吳泳鎭(1916-1974)
평양 출생. 부유한 상인이자 평양 숭인상업학교의 설립자로 민족 지도자이기도 했던 오윤선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유복한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하였으며, 어릴 적부터 영화 구경을 즐겨 하였다고 전한다. 경성제국대학에서 조선어문학을 전공하였고, 대학 4학년때인 1937년 조선일보에 [영화예술론]이라는 영화 평론으로 등단했다. 1938년 영화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발성영화제작소의 조감독으로 있으면서 주로 문예 작품을 제작하기도 하였으나, 1940년 귀국 후에는 아버지 오윤선의 숭인학교의 시간강사로 재직하면서 교육에 힘을 쏟았다. 해방 후 평양에서 조만식이 이끄는 조선민주당의 중앙상임위원으로 활약하면서 정치 활동을 했으나, 북쪽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한 김일성 정권이 들어섰고, 모스크바 3상회의에 반대한 조선민주당은 강제로 해산되었으며, 오영진은 이를 피해 1947년 월남하였다. 그러나 1948년 7월 11일 밤 10시경, 을지로 6가 골목에서 남파된 공산당 간첩으로부터 무려 여섯 발의 총탄을 맞는 테러를 당하기도 하였다. 중상을 입긴 하였으나 오영진은 기적적으로 살았고, 이후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일생을 살았다. 1933년 경성제국대학에서 학우지 {淸凉}에 단편소설 [할멈]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단편소설 [眞相], [거울], [친구의 死後], 중편소설 {언덕 위의 生活者} 등의 소설을 초기에 발표하였으나, 그는 일생을 영화에 대한 관심 속에서 살았고, 시나리오와 희곡을 주로 창작하였다. 희곡으로는 1949년 부상에서 회복된 뒤 쓴 [정직한 詐欺漢],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 등이 있으며, 시나리오는 1943년 발표된 대표작 [맹진사댁 경사]를 비롯하여 1957-1958년에 발표된 [시집가는 날]([맹진사댁 경사]의 개작임), [인생차압], [하늘은 나의 지붕] 등이 있다. 이밖에도 1974년 심장마비로 타계하기까지, [해녀 뭍에 오르다], [아빠빠를 입었어요], [모자이크 게임] 등의 희곡과, 또다른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시나리오 [한네의 승천] 등 다수의 작품을 창작하였다.
2.오영진의 작품세계
오영진의 작품 세계를 보면 시나리오에서는 주로 전통적인 소재들을 다루고 있는데 비해 희곡에서는 현실을 비판, 풍자, 고발하는 사회성 강한 소재들을 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하지만, 그의 작품 세계 전체를 일관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민족의 뿌리인 전통을 찾는 일이며 그러한 전통을 바탕으로 현실에 대한 풍자와 비판을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인생의 비극적인 면을 진지하게 다루기보다는 풍자나 해학으로 시종일관하는 한국적 희극을 시도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비극을 위주로 창작해온 연극 전통에 비해 전통극에서나 찾을 수 있는 풍자성 짙은 희극의 창작은 그의 전통존중 사상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고 본다.
또한 유치진과 신세대 작가들과의 중간적 위치에 있었던 그는 무희라든가 동천홍(東天紅), 모자이크 게임 등을 내놓음으로써 식민지 말엽과 광복 직후의 정치 격동을 이데올로기극 형태로 형상화해 내었다. 예컨대, 신무용의 개척자 최승희의 북한 체제하에서의 파멸 과정을 리얼하게 그려 냄으로써 공산주의의 비인간성을 드러낸 작품이 바로 무희이다. 그는 또 동천홍과 모자이크 게임을 통해 개화기 이후 일본의 침략 과정을 현실과 연결시켜 전율할 정도로 리얼하게 드러내 보여 주었다. 그 점에서 오영진은 매우 탁월하면서도 불행한 작가였다고 하겠다. 그는 이상스러울 만큼 일본에 대한 증오와 공포감에 시달렸다. 그는 일본의 한국 침략과 억압을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인식하였을 정도로 강한 저항감을 지니고 있었다. 가령, 그가 한일 협정 반대의 선봉에 섰던 것은 그 하나의 좋은 본보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가 쓴 동천홍의 경우, 그것이 비록 19세기 후반 일본의 한국 침략 초기 과정을 묘사한 것이지만, 동쪽 하늘이 붉어 온다는 것은 또다른 침략이 시작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영진만은 여타 다른 작가들과 달리, 일제 침략과 억압을 단순한 과거로서가 아니라, 현실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오영진은 우리 근대사의 혼란기를 온몸으로 살아오면서 시대와 역사를 비판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예술성을 앞서는 비판의식이나 사상성이 드러나기도 했지만, 우리 희곡의 소재와 형식, 그리고 내용을 확대시켰다는 점, 시나리오를 문학의 영역으로 끌어 올려 놓았다는 점, 다수의 영화 평론을 써 한국 영화를 본 궤도에 이르게 했다는 점 등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3.
오영진의 는 1947년 11월 초, 그가 평양에서 서울로 월남할 때 지니고 온 것이다. 3막 4장으로 민족 개량주의자 및 매판 자본가가 해방 직후 겪게 되는 파탄의 과정을 극화한 것으로 당시로서는 시사성 높은 작품이었다. 49년 5월 극예술협의회에서 이진순 연출로 초연되었으며, 57년 으로 개명하여 극단 신협이 공연하여 호평을 받았다. 이 성공에 힘입어 58년 유현목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이 작품은 광복 이후에도 조금도 자신을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반민족적인 만행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친일파 이중생의 생태를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또한 그의 불가피한 자살을 그린 희비극이다. 그는 일제 시대 외아들을 솔선해서 징용군에 내보내면서까지 치부를 한 전형적인 친일분자이며, 광복이 되자 국유림을 사유화하기 위해 유령회사를 차리는가 하면, 달러를 융자받기 위해 딸을 미국인의 정부로 이용하는 등 온갖 비리와 사기를 저지른다. 그의 만행과 교활성은 모리배로 검거되었다가 가보석으로 빠져 나온 뒤, 막대한 재산을 건지기 위해 스스로 거짓 죽음의 연극을 꾸미는 데서 절정에 달한다. 그의 이러한 과대한 물욕은 새롭게 열리는 시대 발전에 커다란 장애물로 상징화되어 있으며, 광복 이후의 시대적 이상에 역행하는 구체적인 한 인간상으로서 현실성을 느끼게 해 준다. 그의 거짓 죽음은 하나의 사회적 웃음거리이나, 그의 자살은 냉엄한 현실이 그에게 가한 응당한 결과여서 일말의 비장감마저 감돌게 한다. 이처럼 는 등장인물 개개인의 행위로 광복 이후의 사회적인 현상을 현실감 있게 드러내면서 작가의 냉소에 찬 사회 비판을 짙게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오영진의 의 큰 특징은 우익계열을 대표하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해방기는 정치적으로 좌우이데올로기의 대립양상이 두드러진 시기였다. 이에 따라 문학인들도 어느 한 쪽을 선택하여야만 했다. 오영진은 북한에 있다가 남한행을 택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다른 작가들보다도 더욱더 우익적인 요소를 많이 갖고 있다. 그러므로 결말부분에 징용갔던 하식을 등장시켜 북한의 실상을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하식의 갑작스런 등장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기는 하지만 극적 필연성을 어기는 것으로 극적 긴장감을 떨어뜨리고 있으며 너무 노골적으로 우익을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우익계열의 작품으로는 드물게 봉건 및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극화한 작품이다. 이러한 과제가 한 두 희곡 작품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일제 잔재를 청산해야 함이 당대 작가들에게는 하나의 도덕적, 정치적 의무였으므로 는 그런 의무를 충실히 이행시킨 작품이다. 그러므로 는 1940년대 광복 이후의 희곡 작품을 대표할만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Ⅱ. 본론

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