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와 문학 활동 (1905-1977)
이산 김광섭은 1905년 9월 22일 함북 경성군 어대진면 송신동 128번지에서 해산업을 하는 아버지 전주 김 씨인 인준과 어머니 노옥동 사이에서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6세 때 북간도로 이주했으나 중국인의 행패가 심해서 1년 만에 귀향했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경성공립 보통 학교 3학년에 편입학하여 12세에 졸업하였다. 15세 때 서울 중앙 고보에 입학했으나 1학기를 마치고 중퇴하였고 2학기에 중동 학교에 편입학하여 19세 되던 1924년에 졸업했다. 이듬해 일본 나라(奈良)의대에 색맹으로 불합격, 와세다 대학 제1 고등 학원 영문과와 도쿄 상대 예과에 합격했으나 영문과를 택했다. 1925년에 와세다 대학 영문과에 입학을 하고 와세다 대학 조선인동창회의 청탁으로 『R』지에 민족주의적 습작시 「모기장」을 발표하게 된다. 27세 때인 1932년에 라는 논문으로 졸업했다. 재학 시에는 이헌구, 정인섭 등과 알게 되었고, 28세 때에는 중동 학교 영어 교사로 있으면서 동아, 조선일보에 글을 쓰는 한편 극예술 연구회에 가담하여 서항석, 함대훈, 모윤숙, 노천명 등과 친교했다. 해외 문학파의 후기 동인의 한 사람으로 동경에서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후에도 영미문학의 수입 소개에 노력을 기울이다가 1935년에 접어들어 본격적인 시를 발표하였는데 1938년 제 1시집인 『동경』이 간행된다.
36세 때인 1941년 2월 21일 수업 시간에는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일제의 내선일체, 조선어 과목 폐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폐간 등을 비판하는 발언으로 학생들에게 민족사상을 고취시켰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구속되어 3년 8개월간 수감된다. 해방 이후에 이산의 사회 활동상은 다양하고 화려하다. 좌익 단체인 조선 문화 건설 중앙 협의회 1946년 8월 16일, 과거 카프의 핵심 단원이었던 임화(林和)와 김남천(金南天)·이원조(李源朝)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조선문학건설본부와 성향이 비슷한 조선연극건설본부, 조선영화건설본부, 조선음악건설본부, 조선미술건설본부 등이 연합하여 조직하였다.
와 프로 예술 연맹 과거의 카프 단원이었던 송영(宋影), 이기영(李箕永) 등은 조선문학건설본부의 불분명한 계급적 성향에 불만을 품고 프로문학동맹을 조직하였다. 그리하여 방향이 같은 조선프로연극동맹, 조선영화동맹, 조선음악동맹, 조선미술동맹 등의 단체를 규합하여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에 대응하는 조선프로예술동맹을 결성하였다.
들에 대결하고자 조선 문화 협회를 1946년 9월 8일에 발족시켰고, 자금과 사무실 등 여건을 마련한 다음 9월 18일에는 중앙 문화 협회로 이름을 고쳐 창립하는 데 동참하였다. 창립 멤버로는 변영로, 오상순, 박종화, 김영랑, 이하윤, 김광섭, 오종식, 김보섭, 이헌구, 양주동, 서항석, 김환기, 안석주 ,허영호, 심재홍, 유치진, 서월출, 이선근, 오시영, 조희순 등이 있다.
1948년에는 정부수립과 더불어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공보비서관에 취임하기도 한다. 그리고 1949년 제 2시집 『마음』을 발간하고 1950년 『문학』창간호를 발간하지만 6ㆍ25 전쟁으로 인해 중단된다. 1952년에는 경희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시론ㆍ평론ㆍ문예사조사ㆍ수필론 등을 강의한다. 1955년에는 한국자유문학가협회 위원장에 선출되며 세계작가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한국을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시킨다. 1957년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하고 국제 펜클럽 한국지부 부위원장에 선출되며 제 3시집 『해바라기』를 발간한다. 이후 세계일보 사장에 취임하고 제 29차 세계작가대회 한국대표단 단원으로 참석하기도 하며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부위원장에 선출되고 한국 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이사로 선출되는 등 문단에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1964년 『자유 문학』지(1956-1964)를 운영난으로 무기 정간하게 된 충격으로 고혈압 증세를 보였는데, 이듬해 서울운동장에서 야구 구경을 하다가 뇌출혈로 졸도하여 일주일간 사경을 헤매게 된다. 그리고 의식을 회복하여 투병하던 중 1969년 제4시집 『성북동 비둘기』를, 42년간 고락을 같이 한 부인이 사망한 1971년 사회 시집 『반응』을 내었다. 1968년 68세에는 만해 문학상 심사위원을 지냈고, 69세에는 예술원상을 받았다. 이후『김광섭시전집』,『겨울날』,『나의 옥중기』를 발간했으며, 투병 생활 13년만인 1977년 서울 중화동에서 별세했다.
2. 시기별 작품경향
초기시는 시집 ≪동경≫(1938)의 시기로서 일제 강점기의 절망감과 그것을 인고하려는 의지를 노래했다. 시의 내용이 대체적으로 신변적이고 추상적일 뿐 아니라 그가 즐겨 쓰는 시어도 부드럽지 못하고 딱딱한 관념어를 많이 사용한 시기였다.
중기시는 시집 ≪마음≫(1949)과 ≪해바라기≫(1957)의 시기로서 지적 관조, 옥중 체험, 조국 해방, 전쟁의 상흔 등이 주조를 이룬다. ‘벽’, ‘창’ 등의 이미지로 갇혀있는 의식과 불안, 그리고 한편으로는 해방의 기쁨 등이 동시에 나타난다. 특히, 이 시기『해바라기』는 민족의식과 조국애가 확대된 시편들로 꾸며져 있어 그의 높은 이념을 ‘해’로서 상징하고 민족의 나아갈 지표를 제시하고 있다.
후기시는 시집 ≪성북동 비둘기≫(1969)와 ≪반응≫(1971)의 시기로서 민족 공동체 의식, 사회 비판, 생의 달관, 평화의 정신 등의 주제가 도드라진다. 이때는 폐쇄적이며 내향적인 시를 쓰던 그가 인생을 달관하고 고통과 병을 받아들여 자연과 삶, 그리고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시를 쓴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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