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에바 페론 에비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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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문과학 에바 페론 에비타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Eva peron, Evita
목 차
1. 서론 ; 배경지식
1> 후안 페론
2> 포풀리즘과 페로니즘
3> 에바 페론
2. 본론 ; 영화에 대한 분석
1> 감독과 배우
2> 줄거리
3> 사생아, 에비타
4> 알랜파커 감독의 “에비타”와의 비교
3. 결론 ; 에비타에 대한 입장
1. 서론
1> 후안 페론 (Juan Peron, 1897~1974)
후안 도밍고 페론은 1897년 10월 8일 부에노스아이레스 지방의 한 조그만 마을 로보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외로움과 방황의 연속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팜파스의 지루한 삶에서 도망치고자 돌연 아르헨티나 남쪽에 있는 대서양의 항구도시 푸에르토 마드린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친척이라곤 아무도 없는 고장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페론은 모든 일을 철저히 혼자 해나가야 했다. 혼자서 말을 배우고, 그 어떤 감정도 쉽사리 드러내지 않는 법을 익히고, 그러면서 모든 일을 스스로의 힘으로 꾸려나갔다. 대통령으로서의 페론이 자신의 사상에 유달리 고집스럽고, 독단적이고, 그러면서도 자기 감정에 쉽게 빠져 들었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유년시절의 환경 탓이었을 것이다.
그는 군사학교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는데, 이는 아버지의 자유분방한 삶과 어머니의 불륜에 대한 저항의 표출로, 스스로를 엄격한 규율 속으로 몰아세우려 했던 그의 마음에 강한 영향력을 받은 것이다.
말도 잘 타고 권투도 잘 하며 뛰어난 칼솜씨를 가졌던 페론은 엄격한 군인이 됨으로써 공허함을 메우려고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를 분명한 선 안에 놓아두고 인생의 와해를 피해 보려고 했다. 그것은 가족으로부터의 도피였고 유배였다.
그는 1915년에 보병대 소위, 1919년에 중위, 1924년에 대위로 비교적 빨리 진급했고 군대 교본도 씀으로써 두각을 나타냈다.
1930년 일리고이엔 타도의 군부 쿠데타에 참가하였고, 1943년의 쿠데타에서는 통일장교단(GOU)의 리더로 쿠데타를 주도하고 정계에 진출하였다. 1944년 파레르 군사정권하에서 부통령으로 재임하였고, 육군 장관 겸 노동 장관이 되어 노동조건의 개선과 임금인상으로 노동자의 인기를 독차지하였다. 그에게 반대하는 세력으로부터 사임을 강요당하고 체포되었으나, 오히려 노동대중의 지지를 얻어, 1946년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국가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노동자 임금인상, 복지제도 도입, 기간산업 국유화 등의 정책을 추진하였고 1951년에 재선되었다. 1952년 부인 에바가 사망한 후 급격히 단행되었던 모든 개혁의 파탄이 차차 표면화되고, 1955년 교회억압을 계기로 하여 카톨릭 교도와 군부의 지지를 잃게 되어, 9월 군사혁명으로 국외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망명 중에도 그의 내셔널리즘과 노동자정책 등에 대한 국민의 추억이 끈질기게 작용되어, 1973년 9월 대통령선거에서 부통령 후보인 부인 이사벨과 함께 부활을 이루었으나 1974년 7월 세상을 떠났다.
아르헨티나 중산층의 대부 페론
어떤 이들은 ‘아르헨티나인들이 페론이즘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아르헨티나의 장래는 없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라포포르트 박사는 아르헨티나의 역사상 소득의 분배가 가장 잘 이루어지고 산업이 활발하게 움직였던 시기가 페론집권 시절이었다고 반박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페론집권 시기인 1949년에서 1976년까지 국민총생산은 127%의 성장을 기록했고 개인소득은 232%가 증가했다. 이런 수치의 발전은 아르헨티나 역사상 처음이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페론은 정권초기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으나 아르헨티나 역사상 가장 많은 산업투자를 단행했고 아르헨티나가 농업국가에서 공업화로 가는데 이바지했다. 그리고 모든 기간산업을 국유화 시켰다. 이 과정에서 지방의 토호세력들과 해외 자본가들과의 마찰은 불가피했고 이런 불만세력들이 군부를 움직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는 산업의 국유화가 세계적인 추세였다. 물론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명분도 있었지만. 76년 정권을 잡은 군부는 페론의 업적을 말살시켰으며 국민들을 세뇌시키는 작업을 단행했다. 따라서 페론의 업적이 아직까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것이다. 페론은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가 아닌 자본주의 사상을 지녔지만 소득의 재분배에 심혈을 기울여 소수에 몰린 부를 다수에 재분배하는 데 기여했다. 이 기간동안 아르헨티나 국민 가운데 60%를 차지했던 극빈서민들이 전체 국가소득의 33%를 분배 받았다. 이 또한 아르헨티나 역사상 처음 있는 부의 재분배 현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