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임권 투쟁에 나타난 교권과 속권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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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서임권 투쟁에 나타난 교권과 속권의 관계
1. 들어가는 말
서로마제국이 멸망(476)하고, 이 지역에 동로마제국의 영향력이 약해지는 시기에 기독교는 최강의 사회적 통합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프랑크의 왕 샤를마뉴도 독일의 왕 오토도 기독교를 통해서 옛 로마의 뒤를 이을 수 있었다. 기독교 문화, 정치 체제 등은 세속의 문화, 정치 등과 그 경계가 불분명하였고, 세속의 통치자가 교회의 속한 영역을 넘나드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중세에, 교회는 국가 내에 있는 사적인 조직으로 간주되지 않았으며, 또한 국가의 지배에 복속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중세 사상가들은 두 개의 정부에 의해 통치되는 하나의 기독교 사회라는 관념에서 출발하였다. 교회 정부는 정신사와 종교적인 일들을, 세속 정부는 현세사와 이 세상에 속한 일들을 관리하였다. 그러나 두 정부의 상호 갈등이 일어날 가능성은 항상 존재했다. 두 정부 사이에 올바른 관계를 이룩하려는 시도는 중세사의 중요한 주제들 중 하나이다. B. 타이어니 엮음,『서양 중세사 연구』 (서울: 탐구당, 1987), 337.
이 글에서는 서임권 투쟁을 통해서, 교권과 속권의 상호 갈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2. 교권의 강화
레오 1세(440-461)는 로마 교황제에 대한 고전적 개념을 수립하였다. 레오는 모든 다른 사도들보다 베드로가 으뜸임을 주장하였다. 그는 클레멘스 감독이 예수의 형제였던 예루살렘의 야고보에게 보낸 편지에 로마의 대주교를 베드로의 후계자로 확정지었다고 생각했고, 여기에서 베드로가 그의 마지막 유언에서 클레멘스를 그의 유일한 합법적인 후계자로 인정하였다고 보았다. 그리고 레오는 로마 유산법의 도움을 받아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교황의 위상을 공고히 하였다. 그러나 레오는 교황의 우선권을 인정받지 못했다. 5세기 말 겔라시우스 1세(492-496) 때, 로마 교황 권세에 관해 일시적 절정을 이끌기도 하였다. 한스 큉, 배국원 역, 『가톨릭교회』(서울: 을유문화사, 2003), 85-88.
그러나 교황권이 주장을 넘어서 실제적으로 황제의 권위에서 독립되거나, 우위에 서지는 못하였다.
882년에는 요한네스 8세의 죽음을 기점으로 교황청은 그 뒤 거의 한 세기 동안 불화와 폭력으로 얼룩진 이탈리아 정치 상황으로 끌려들어가 지역 군주들과 로마 귀족들의 노리개가 되기도 하였다. 윌리스턴 워커, 송인설 역, 『기독교회사』(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1), 287.
교황권이 강화되어 절정에 이르게 되는 과정은 일련의 개혁운동이 자리잡고 있다. 고위 성직자들이 봉건영주와 같이 되었을 때, 클루니 수도원은 개혁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고 클루니 수도원은 교황에게 직접 종속되어 교황권 강화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교황청은 이러한 개혁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교황청의 개혁은 레오 9세(1049-1054)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윌리스턴 워커, 304.
교황 레오는 성직 매매와 성직자 결혼을 정죄하며, 로마 교회를 대표하는 추기경단을 구성하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훔베르투스와 나중에 교황 그레고리 7세가 되는 힐데브란트였다. 니콜라스 2세(1058-1061)는 1059년 로마 교회회의에서 추기경들을 통한 교황 선출에 관한 법령을 통과시켰다.
하인리히 4세(Henry Ⅳ)는 오토 1세 이래로 모든 독일 황제들이 그러했듯이 성직 임명과 교회 재산에 대한 통제권에 의존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평신도 서임권에 대한 교황청의 정책과 독일 왕이 충돌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서임권 투쟁의 구체적인 사건은 밀라노 대주교를 임명하는 문제였다. 하인리히 4세는 카스티글리오네의 고드프리를 임명하고자 했는데, 이 사람은 교황 알렉산더 2세에게 성직매매 죄로 고소당한 적이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알렉산더는 오토를 대주교로 인정하였다. 하인리히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 문제는 다음 교황인 그레고리 7세(Gregory Ⅶ)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그레고리는 1075년 2월 평신도 서임권 금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