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려시대
13세기 이전 고려 사람들은 대체로 단군을 평양의 사당에 모셔진 지역 시조신 또는 황해도 구월산 지역의 삼성사 등에 모셔진 민간신앙적 자연신으로 생각했는데 몽고침략 전후부터 국가시조, 역사공동체 시조인 단군 숭배로 바뀌기 시작한다. 1270년 전후 쓰여진 일연의 삼국유사는 우리 최초의 역사공동체 시조로서 단군을 채록했으나 중국의 자료로 구성하여 단일 혈연공동체에서 이어진다는 의식이 혼란되어 있다. 이승휴의 제왕운기(1287)는 3조선계승의식을 체계화하여 17세기 호란 후 정통론이 도입되어 비판되기 전까지 기본적인 고대사 인식체계로 받아들여진다.
2. 조선전기
건국 직후 단군을 국가시조이자 동방의 역사공동체의 시조로서 선포하였고 단군의 옛 국호를 이어받아 조선이라 하였다. 1392년 조박은 단군과 기자 사당을 건립하고 국가 시조로 받들어 제사할 것을 건의하였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1394)에서 조선 국호 사용의 의미를 고구려, 백제, 신라라는 지역분립국가를 넘어서는 국가공동체이고 중국 요임금과 같이 국가공동체가 출발하고 중국 주무왕과 같이 문화공동체가 출발한 유구한 역사공동체라고 하였다. 1429년 평양에 단군과 동명왕의 사당이 세워지고 1456년 단군위패를 조선시조로 기자위패를 후조선시조로 확정한 후 중국 사신들이 평양을 지날 때 기자 사당과 함께 들러보는 국가적 사당이 되었다. 변계량이 기우제를 지내자고 주장한 태종실록의 기록과 삼성사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은 하늘에 대한 제사와 관련하여 神人인 단군 숭배가 부각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종실록지리지는 단군사, 삼성사, 장장평, 참성단, 삼랑성 등 단군시대 유적을 기록하고 있다. 이 단계까지는 단군이 국가를 개창한 하늘의 명을 받은 독자적인 국가시조로서의 단군 숭배가 강조되었고 문화영웅으로서 권위는 기자를 통하여 강조되었다. 반면에 15세기 말 동국통감이 편찬되면서 단군 숭배를 무의미하게 보는 경향이 확산되었다. 16세기가 되면 천명을 받은 최초 국가공동체의 시조가 단군이라는 인식도 약해졌다. 그 대신 동방 도학의 시조로서의 기자 인식이 부각되면서 단군은 기자 때문에 역사에서 의미를 설명할 수 있는 정도가 되어버렸다. 17세기 초 한백겸의 동국지리지에서 조선계승의식과 한계승의식 2원적으로 파악된다는 사실을 제시하여 3조선계승의식이 비판되었다. 홍여하의 동국통감제강에서 조선계승의식을 무의미하다고 하여 역사에서 삭제하고 고구려를 변방국가로 규정하는 등 철저한 반도중심, 신라중심 사관인 삼한 정통론을 주장했다.
3. 조선후기
정통론에 입각하여 단군 숭배를 우리 역사공동체에서 무의미하게 보는 인식에 대한 비판이 17세기 중반에 대두했다. 권별은 해동잡록에서 제천 관련 단군유적에 주목했다. 허목은 동사에서 단군을 정통국가에 포함시켰고 단군혈통인 고구려를 포함하는 모든 시조설화를 하늘과 연결성을 가지는 실제 역사로 인정하는 등 혈연공동체를 강조하였다. 홍만종의 동국역대총목은 단군의 치적을 거론하여 문화영웅으로 승화하였다. 18세기에는 안정복이 동사강목에서 허목, 홍만종이 제시한 단군 인식을 보다 체계화시켰다. 안정복보다 더 나아가 단군정통론을 세운 동시에 단군 신교까지 인정한 것은 동사를 쓴 이종휘였다.
조선후기에도 단군사당은 조선을 개창한 신인으로 계속 제사가 올려졌다. 평안도민에 의해 숭령전으로 격상되었고 삼성사 제사의식도 계속 개정되어 결국 평양 단군전과 같은 격이 되었다.
4. 민족해방투쟁기
1896년 대한제국 선포 이후, 한계승의식이 더 강조되었고 기자 문화전통에 모든 개화정책을 붙여 계몽하는 방향으로 굴절되어 갔다. 한말 교과서를 비판한 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 부여가 단군을 계승했다고 제기했다. 단군 신교를 바탕으로 근대적이자 민족적인 민중종교인 대종교를 만들어 일본의 침략에 대응하려 한 본격적 종교운동이 시작되었다. 대종교의 단군 숭배에 대한 역사적 문헌은 김교헌의 신단실기로 한말교과서의 한계승의식과 신채호의 부여계승의식을 단군계승의식으로 종합했고 허목, 안정복 계통의 유교적 인식을 근대 민족주의 입장에서 발전적으로 수용했다. 이후 박은식의 한국통사, 안확의 조선문명사, 권덕규의 조선유기 등에 영향을 미쳤다. 최남선은 불함문화론을 발표해 단군숭배의식에다 대동아공영론 및 일본 신도와 연결성을 설정해 크게 변질되었다. 이에 대한 강력한 대응은 유물사관 진영의 백남운과 김태준에게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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