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어학 현대 한어 성조와 방언과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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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현대 한어 성조와 방언과의 비교
1. 성조(聲調)의 성립
중국어의 특징 중 하나는 성조가 있다는 점이다. 중국어에서 성조는 성모, 운모와 마찬가지로 의미를 변별하는 기능을 한다. 예를 들면 “妻, 騎, 起, 氣”는 모두 qi로 읽혀 성모와 운모는 동일하지만, 성조의 차이로 인해 의미도 완전히 다르다. 따라서 성조는 중국어의 음을 분석할 때에 성모, 운모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성조는 중국어 뿐만 아니라 한 장(漢藏) 어족 언어들이 공유하고 있는 유형론적 특징이다. 중국어 성조의 시작 시점에 관하여서는 모호하여 잘 알 수가 없다. 다만 은대(殷代)에 들어와서 한족들은 언어와 문자를 구사하여 생활의 모든 표시 수단으로 삼았던 것을 실제로 볼수 있고 발전된 양상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은대 한족의 언어가 어떠한 언어였는지 단정할 수가 없다. 오늘날 은대의 문자로 약 4.000에 가까운 글자가 남아 있지만 그들 언어가 어떠하였는지는 더욱 연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들 자료에 의거하여 보면 이것이 바로 주대(周代) 문화로 이어졌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은대의 중국어가 성조언어였는지 증명할 좋은 방법은 없다. 그러나 주대의 언어는 기록자료상 상이하게 성조가 구별되고 있고 이로 미루어 당시부터 성조를 가지고 있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중국어성조의 기원문제는 주대를 시초로 봄이 옳을 것이다. 중국언어학 공재석 저 신서원 2002년
중국에서 성운학이 발안되어 근세까지 전통적인 논법으로 사성이 제대의 심약(沈約,441~513) 자 휴문(休文). 시호 은(隱). 저장성[浙江省] 우캉[武康] 출생. 어려서부터 빈곤 속에서도 면학(勉學)에 힘써 시문(詩文)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처음에 송(宋)나라를 섬기다가 송나라가 망하자 제(齊)나라를 섬겼는데, 소연(蕭衍)이 제나라의 제위(帝位)를 빼앗아 국호(國號)를 양(梁)으로 고쳤을 때, 이를 도운 공으로 건창현후(建昌縣侯)에 봉해졌다. 그 후 513년 73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귀현(貴顯)의 자리를 차지했다. 은(隱)이라는 시호를 받은 탓으로 심은후(沈隱侯)라고도 하며, 또 제나라 때 동양태수(東陽太守)를 지냈다 하여 심동양(沈東陽)이라고도 일컬어진다. 그는 정치가로서보다도 문인으로 뛰어나, 문학사(文學士)를 좋아했던 제나라의 문혜태자(文惠太子)와 그 아우인 경릉왕 자량(竟陵王子良)의 사랑을 받아 문단의 중견이 되었고, 양(梁)나라에 들어가서도 그 세력을 유지하였다.
당시 임방(任昉)의 문장, 심약의 시를 으뜸으로 꼽았는데, 그의 시는 세밀한 염정(艶情)을 노래하는 데 뛰어나 ‘궁체시(宮體詩)’의 선구(先驅)가 되었다. 그는 또 불교에 능통하고 음운(音韻)에도 밝아, 비로소 사성(四聲)의 구별을 명백히 하고 시의 팔병설(八病說)을 제창했다. 그의 음운설(音韻說)은 영명체(永明體)의 성립과 깊은 관계가 있을 뿐 아니라 근체시(近體詩) 성립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사성보(四聲譜)》 《진서(晉書)》 《송서(宋書)》 《제기(齊記)》 《송세문장지(宋世文章志)》 등 저술이 많았으나 《송서》만 전해지고 있다. 100권이나 되는 문집도 현재는 《한위육조 일백삼가집(漢魏六朝一百三家集)》에 실린 《심은후집(沈隱侯集)》(2권) 《한위육조명가집(漢魏六朝名家集)》에 수록된 《심휴문집(沈休文集)》(9권) 등이 남아 있을 뿐이다.-네이버 백과사전
에 의하여 발명된 것으로 알려졌던 것이다. 이점은 오늘날 이해를 달리 하여 사성의 명칭은 이시대에 발명된 것이나 성조는 이미 있었던 것이라 하는 것이다. 즉 중국의 사성이 심약등에 의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은 아니다. 심약은 중국어에 성조가 있음을 발견하고, 당시의 성조를 평, 상, 거, 입의 네 류로 나누었다. 그리하여 이로부터 중국어의 성조를 분류하는 기초가 정해져서 역대로 쓰여져왔다. 사성팔병설 [四聲八病說]
중국어에 평(平)·상(上)·거(去)·입(入)의 4성조(聲調)가 있다는 것은 경험을 통하여 이미 알려졌으나, 제(齊)·양(梁) 무렵에 심약·주옹(周) 등이 이를 명확히 논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시의 한 구 안에서의 조화를 꾀하는 방법이 의식적으로 안출되었다. 심약은 팔병설을 내세워, 작시상 피해야 할 점들을 지적하였다. 팔병이란 평두(平頭)·상미(上尾)·봉요(蜂腰)·학슬(鶴膝)·대운(大韻)·소운(小韻)·방뉴(旁紐)·정뉴(正紐)를 말한다.
제1구와 제2구의 첫머리가 평성(평두)이 되고, 1구 5자 중에서 제2자와 제5자가 동성(同聲:蜂腰)이 되는 것 등은 시율(詩律)상으로 중요한 부분의 동성조(同聲調) 중복이며, 이를 피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법칙은 전적으로 실천되지는 않았으나, 이것으로 말미암아 더욱 시가 세련돼 갔으며, 당대(唐代)에 들어 근체시(近體詩)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네이버백과사전
그러면 사성이 어떻게 남조시대(420~589)에 발흥되었나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성운학이 남조시대에 성하게 된 것은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결과라고 보고 있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온 것은 대게 한무제 때(AD.25~27) 서역을 정복한 이후로 한 명제8년(AD.65) 채운을 파견하여 서역에서 불법을 구하여 2년후에 돌아왔고 그때 서역의 승려 마등과 측법난이 불경을 가지고 들어왔던 것이다. 이것이 불교전입의 시초이고 그 후로 불경의 번역이 크게 유행하게 되었고 남조 양무제는 불가에 입신까지 하였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남조때 불학의 기풍은 대단하였던 것이니 당시의 문사들이 불경에 심취하였고 불경의 번역에 있어 자연 인도의 ‘성명론(聲明論)’이란 운학(韻學)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중국어의 성조를 4가지 종류로 정한 까닭은 바로 당시 불경을 중국어로 읽을 때의 삼성과 관련이 있으며 이 삼성은 인도의 성명론의 삼성에서 온것이라 보았다. 범어(梵語)에는 원래 성조가 없으나 불경을 중국어로 읽을 때의 삼성은 바로 소리의 고저를 세 단계로 나눈 것이다. 심약 등은 이러한 점이 음고를 본질로 하는 성조와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음운미(塞音韻尾, 음운의 꼬리가 닫힘?)가 없는 글자들을 세 종류의 성조로 나누어 平, 上, 去로 하고 새음운미가 있는 것을 따로 분류하여 入이라 불렀다고 한다.
제(齊) 영명(永明)년간(483~493)에 4성이 일반 문장에 응용될만큼 성행되었다. 심약을 중심으로 사성을 응용하여 성율론을 전개하여 문학에 있어 하나의 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며 이들 문사들은 그 당시의 사회적인 환경하에 불경에 이미 심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 성조를 활용하는 방안을 발견하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