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해방전후기 백범김구와 농민의 삶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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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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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해방전후기 백범김구와 농민의 삶 고찰
Ⅰ.인물설정계기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 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
"백성한테 무얼 좀 고마운 노릇을 해주어야 백성두 나라를 믿고 나라에다
마음을 붙이고 살지. 독립이 됏다면서 고작 그래 백성이 차지할 땅 뺏어서
팔아먹는 게 나라 명색이야? 독립됐다구 했을 때 만세 안 부르기 잘했지.”
위는 삼천만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글에 언급된 김구 선생의 말과
채만식의 논 이야기에 나오는 한생원의 말이다. 동일한 시대 상황에서 대조적으로 보이는 두 위치에서의 인물에 대한 호기심에 김구 선생과 농민을 선택했다.
이하에서는 가족과 평범하게 살아가고픈 소박한 꿈을 지녔던 농민의 해방전후기의 생활을 상상하여 글을 써보고 당시 어떤 처지에 놓이며 의식의 변화를 겪는지 생각해 보겠다. 또한 백범 김구 선생의 민족을 위한 일대기를 알아보고 그 과정에서 느낀 나의 생각과 마직막으로 내가 이 시대를 살았다면 어떻게 살았을지 상상해 보겠다.
Ⅱ.농민 갑봉이의 해방전후 삶
① 농민 갑봉이의 삶: 지주에서 민족운동을 하는 소작농으로의 변화
갑봉이는 경상남도 김해에 1결에 가까운 논과 밭을 가진 부자집에서 태어났다. 갑봉이네는 여러 집에 소작을 주었고, 소작을 하다 자립한 소작인도 상당히 많았음은 물론이다. 도련님 소리를 들으며 살았지만 농사철이 되면 소작인과 일꾼만 힘들고 바쁘게 일하는 것이 아니었다. 농사철이 되면 다들 바쁘게 매달려 일해야만 무리 없이 농사일을 마무리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농사일이 농번기라는 기간에 집중이 되어, 이때가 되면 주인이나 아이들 할 것 없이 농사에 매달려 다들 혹사당했다. 갑봉이도 이렇게 크면서 농사에 잔뼈가 굵었다. 더욱이 글공부에는 관심이 없던 갑봉이는 아버지가 물려주실 넓은 땅을 기반으로 마을의 유지로서 살고자 했다.
하지만 갑봉이가 다섯 살 되던 해 일본인들이 하나둘씩 건너오면서 마을의 분위기는 달라져 갔다. 처음에는 단순히 땅에 투자만 하러 온 줄 알았으나, 점점 많은 양은 땅을 매수하기 시작하면서 작게나마 자기 땅을 가지고 근근히 생활해 나가던 사람들은 소작농민이 되어갔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갑봉이는 건강하게 자랐고 갑봉이네 재산은 점점 늘어 갔지만 어린나이의 갑봉이도 마을사람들이 점점 어려워 지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그렇게 갑봉이가 스무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갑봉이가 가장으로서 집안을 책임지게 되었다.
어린나이에 집을 물려받은 갑봉이는 어머니와 함께 농사를 계속 하게 되었다.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낸 갑봉이는 아버지가 그랬듯 누가 땅을 사는 것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회에 대한 관심보다는 개인적인 재산의 축적에 더 큰 관심을 두었고 덕분에 일본인과도 큰 마찰없이 친분을 쌓을 수 있었고, 관리들과도 자연스레 안면을 익혔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처음과는 달리 여러 가지 악질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땅을 차지하기 시작했고 갑봉이가 가진 땅을 차지하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다향이도 몇몇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땅은 여전히 갑봉이의 소유로 남아있었다. 이것도 일본인 친구의 도움이 없었다면 쉽지 않았을 것이다. 대한제국의 증명서 발급을 위해 소유신고를 수차례 했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들어 잘 받아주지 않았던 것이다. 적법한 신고 요건을 갖추었음에도 토지의 절반정도가 증명서 발급이 이루어 지지 않자 너무 다급해진 갑봉이는 친하게 지내던 일본인 친구에게 찾아가 관리를 연결해 줄 것을 청탁했다. 수차례의 선물이 이 친구를 통해 관리에게 전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관리는 직접 조사도 하지 않은 채 증명서를 만들어 줬다. 실제로 이런 편법이 만연한데도 일본인들은 빈번하게 증명을 이용했다. 배타적 소유권이 확실 한 때에는 구태여 이런 증명을 이용할 필요도 없었고 이용하지도 않았지만, 증거력이 부족하여 소유권이 불안한 때에는 종종 이 제도를 이용하여 사기적 강압적 수단으로 땅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는 비단 일본인뿐만 아니라 서양 선교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기회를 이용해 여러 주인 없는 땅이 갑봉이네 소유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근처의 유일한 한국인 지주였던 갑봉이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은 늘어가기만 했다. 돈을 빌리러 오는 사람, 소작논을 받으러 오는 사람, 일감을 구하러 오는 사람등, 여러 사람이 있었지만 그 중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그나마 인맥이 닿으니 말좀 해달라는 청탁이 하루에도 몇 건 씩 되었다.